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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9> 전쟁의 아픔을 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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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9> 전쟁의 아픔을 딛고

입력
2003.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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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많은 것을 빼앗고 파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정신의 파괴현상이었다. 특히 전쟁기간 중 인민군과 국방군이 번갈아 점령한 지역에서 나타났던 이념갈등의 후폭풍은 많은 피해자를 남겼다.전세가 역전돼 국군이 다시 밀고 올라온 부천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펼쳐졌다. 마을은 환영식이다 뭐다 하면서 들떠 있었지만 나는 부역자로 낙인찍히는 바람에 마음이 편치 않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결국 나는 청년 자위대라는 사람들에 붙잡혀 면사무소로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번에는 이장 등 마을 유지들이 적극 나서 주었다. 구명운동에 나선 이들은 "원경선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공산당의 말을 들어준 것 뿐입니다" "원경선은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 먹이고 재워준 죄밖에 없습니다"는 등의 말로 변호해 나는 결국 무사할 수 있었다. 실제 나는 인민군 점령시절 치안유지회 일을 하긴 했지만 신념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같은 혐의로 끌려왔던 몇몇 사람이 밤새 몰래 끌려나가 계곡과 구덩이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전쟁 통에 몇 번씩 생사의 기로에 서야 했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념에 대해 이전까지 한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념의 위력 앞에서 나는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은 나에게 또 한번 시련을 강요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국군이 밀려나는 1·4후퇴로 나는 마흔이 다 된 나이로 제2국민병에 편입됐다. 전력보강 차원에서 창설된 '국민방위군'에 징집된 나는 어쩌다 훈련소가 있던 제주도까지 가게 됐다.

제주도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부패한 군인들이 쌀과 옷을 빼돌리는 바람에 밑바닥 대원들에게는 돌아오는 게 하나도 없었다. 춥고 배고픈 날의 연속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출발할 때 따로 돈을 챙겨 부대 밖에서 음식을 사먹기도 했지만 작은 성경 하나만 들고간 나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곁에서 고구마를 먹고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훈련소 내에서는 역병마저 돌아 하룻밤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 광경까지 목격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천행이었다. 12월에 끌려가 다음해 5월에 돌아왔으니 반년 가까이 짐승같은 생활을 한 뒤였다. 그런데 집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여섯살짜리 둘째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려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전쟁은 이렇게 나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전쟁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부천 소사의 땅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땅은 마치 나에게 정직하고 바르게 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중국과 서울생활에서 내가 저질렀던 사치와 부정부패의 대가가 전쟁 통의 시련이었다면 시련은 세상에 바른 삶을 전도하라는 계시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전도는 바로 이 땅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렇게 공동체는 시작됐다. 그러나 처음에는 공동체가 그저 구호기관에 불과했다. 교회 일로 친하게 지내던 미군 군목들이 데려오는 전쟁고아나 갈 곳 없는 노인들로 농장은 북적대 탁아소나 양로원을 방불케 했다. 아이들은 들락날락하기 일쑤였고 노인들도 제대로 된 양로시설을 찾아가기 위한 정거장 식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다. 체계가 필요했다. 몰려오는 대로 모두 구호할 처지도 안됐다. 그렇다면 굶주림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은 최선의 방안은 무엇일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치는 건 어떨까. 함께 일하고 함께 먹는 공동체! 이렇게 풀무원 공동체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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