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렵다. 농민들이 죽음에 내몰리고 기업이 망해간다. 정치인들은 권력 투쟁에 정신이 없고 노사관계는 점점 나빠진다. 대통령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사람들은 환란 위기 때보다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푸념하며, 언론은 국가 위기 상황이라고 염려한다.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말들이 그치지 않는다. 이런 속에서 희망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보자. 한국은 누가 뭐래도 눈부신 경제성장과 괄목할 정치 민주화를 둘 다 이룬 세계의 본보기다. 1990년대 초 온 사회의 민주화 욕구가 터져 나왔을 때 정권은 '총체적 위기'라고 했다. 90년대 말 환란 위기가 터지자 과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때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언제나 위기인 셈이다. '언제나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니다. 그 '위기' 속에서도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고 민주주의도 꾸준히 발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 언론들은 앞 다투어 세대갈등을 걱정했으나, 세대간에 무슨 대단한 갈등이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노동 분규가 일 때마다 언론은 앞 다투어 '대란'을 경고했지만, 그런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직까지 나라를 떠난 외국 기업도 없다. 이념 갈등이 심각해졌다고 하나, 폭력으로 이어질 정도도 아니거니와 그 정도의 이념 갈등은 오히려 있는 것이 더 건강하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고도성장이 끝난 이제 우리는 연 3∼4% 성장에 놀라지 않을 정신적, 물질적 체질을 갖추어야 한다.
민주당 분당 사태에서 일어나는 추잡한 모습들을 보고 우리는 한탄한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이제 비로소 1인 보스 정치, 지역 패거리 정치를 벗어나 이념과 정책 구도로 갈라질 첫머리에 들어섰다. 분명한 발전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잡음 때문에 진정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위의 말들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나라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너무 비하하고 나라의 미래를 너무 비관하는 것은 틀림없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우선 우리가 주제를 잘 모른다. 좀 자랐다고 마치 선진국민이 된 양 매사를 선진국과 비교한다. 그러면서 개도국의 고도성장을 함께 부러워한다. 미국의 부강함과 효율성, 일본의 질서 의식, 싱가포르의 안정, 중국의 성장률을 잣대로 놓고 보니 우리는 항상 못나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비만과 인종차별, 일본의 장기 침체, 싱가포르의 권위주의, 중국의 부패와 무질서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어디에도 이상향은 없다. 눈을 현실에 두어야 낙관론이 생긴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이다. 기득권층은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결과, 나타나는 못 가진 자의 권익 투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물질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그들은 심하게 말하여 '못 배우고 더러운 폭도'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총체적 위기'다. 그러나 민주화의 역사는 언제나 그랬다. 지금의 '위기' 또는 혼란은 민주주의의 심화 과정이고 배분적 정의의 투쟁 과정이다. 그것은 진보이지 결코 후퇴가 아니다. 기득권층은 자신의 이익에 위기가 왔기 때문에 나라 전체에 위기가 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한국 사회는 결코 그들이 우려하듯이 '민중 독재'로 경제를 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기득권층이 너무 강하다. 하물며 그들 뒤에 국제통화기금과 미국이 버티고 있음에랴!
내 낙관론은 눈을 낮춘 낙관론이다. 한국은 잘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럭저럭 잘해 나갈 것이다. 한국이 결코 자랑스러운 선진 문화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지만, 이미 세계의 발전사상 뛰어난 모범이 되었다. 이 세상에 이상향은 없다.
김 영 명 한림대 사회과학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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