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눈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나인
空王(공왕)처럼 고요한
투명성의 來歷(내력)은
오래된 것이다
눈꺼풀을 떼어낸 눈처럼
거울은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이 짧은 시에는 긴 설명이 달렸다.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것은 눈꺼풀 없는 눈, 속눈썹 없는 눈, 눈동자 없는 눈이라고 말할 수 있다…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 눈은 우리를 무심하게 보고 있다.' 기이하게도 인간은 자신을 볼 수 없다. 인간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시인은 시에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얼굴은 일찍이 있었으되 그것을 보게 된 것은 시를 통해서였다. 시인에게 '쓰다'라는 행위는 '보다'와 다르지 않다.
최승호(49)씨가 열한 번째 시집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를 펴냈다. 3년 만이다. 시인은 "나는 쓰고 싶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문을 열 때마다 낯설고 놀라운 풍경이 눈앞에 처음 펼쳐지는 것처럼." 눈앞의 풍경을 '보는' 것처럼 '쓰고' 싶다는 말일 게다. 그래서 그는'할 수 있는 것은 시 쓰기 밖에 없는 듯' 시를 써왔고, 아주 고른 시적 완성도를 유지해왔다.
그는 등단 5년 만인 1982년 '대설주의보'로 '오늘의작가상'을 받으며 문단의 눈길을 끌었다. 네 번째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한칼에 가르는' 묘사로 독자의 가슴을 그었다. 시어는 그 이상 들어맞는 게 없는 듯 정확했다. 그의 시 쓰기는 불필요한 것을 깎아내는 방식이되, '가난해지기'가 아니라 '가벼워지기'였다.
시집 '회저의 밤'에서 최승호씨의 시 세계는 한 고비를 돌았다. 평론가 성민엽씨는 "시집 '회저의 밤'을 분기점으로 이전이 부정의 사유로 특징지워진다면, 이후는 긍정의 사유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최씨의 시에 불교적 세계관이 드리워졌다는 데 평론가들은 동의하면서도 종교적 색채를 표나게 돋우지 않는 데 대해 높이 평가했다. 새 시집은 그 분기 이후 그가 노래해온 무(無)와 공(空)의 세계가 담겨 있다. 시집에 실린 50여 편의 시는 언뜻 보아 그 무게가 가벼운 듯 싶은데, 한 걸음 발을 담그면 깊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우리는 한계 속에서 살다 무한 속에 죽을 것이다/ 그러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우리는 무한을 누리다 한계 속에 죽을 것이다'('수평선'에서)
이제는 많이 친숙해진 '텅 빈 세계'보다 신작 시집에서 도드라진 것은 '쓰다'와 '보다'의 동격이다. 먼저 풍경이 있고 시는 그것을 '본다'. '들장미라는 말이 떠오르기 전에/ 들장미가 있었다'('재 위에 들장미'에서) 그러니까 최승호씨에게 시 쓰기는 이미 있었던 것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그렇게 쓰다 보면 시인 자신은 볼 수 없었던 얼굴도 발견한다. '정오 무렵, 섬을 가로지르다/ 평지처럼 밋밋해진 무덤을 밟고 서 있는/ 수염 긴 염소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묘한 느낌!'('아지랑이'에서)
최씨의 시집은 열림원이 새롭게 기획한 시인선 '문학·판/시'의 첫 권으로 나온 것이다. 앞으로 김록 시인의 '광기의 다이아몬드'와 이성복 시인의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이 나올 예정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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