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색깔은 붉다. 그 붉음은 산꼭대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주름진 계곡, 산사(山寺)의 앞마당에서 시작된다. 북쪽 차가운 곳이 아니라, 온화한 남쪽 계곡이다. 가을의 전령, 꽃무릇이 피었다. 전북 고창의 선운사와 전남 영광의 불갑사. 피었다는 표현은 부족하다. 땅덩어리가 온통 붉은 색으로 뒤집어졌다.꽃무릇은 백합목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일본에서, 혹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일본의 남부 지방에 군락이 많아서 일본 유입설이 생겼고, 일본에서 부르는 꽃이름 중 ‘만주의 꽃’이라는 것이 있어 중국 유입설도 나왔다.
무리지어 자라는 꽃무릇은 9월 초순 뿌리에서 꽃대가 올라온다. 꽃은 백로 무렵부터 피기 시작해 9월말에 절정을 이룬다. 꽃이 지면 잎이 핀다. 겨울을 이기고 이듬해 봄에 시든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서로 그리워만 하는 ‘운명의 상사화(相思花)’라고도 불린다. 정확하게는 상사화와 자매간이지만 흔히 혼용돼 불린다. 꽃무릇은 우리 들판에 피는 여느 꽃보다 화려하다. 특히 수술은 미인의 속눈썹처럼 길고 아름답게 휘어져 있다. 흔히 ‘왕관’에 비유된다. 색깔이 특별하다 못해 선정적이기까지 하다.
고창의 선운사를 상징하는 것은 꽃무릇이 아닌 다른 꽃이다. 절집 뒤를 감싸고 있는 동백(천연기념물 제 184호)이다. ‘선운사=동백’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그러나 동백꽃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가을이 오면 꽃무릇이 붉은 색을 대신한다. 절 입구에서부터 도솔암까지의 3㎞ 구간이 군락지이다.
굳이 절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선운사 관광시설지구에서 절 입구에 들면 눈에 온통 붉은 빛만 보인다. 특히 길을 따라 난 개울 건너편에 많다. 바위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조심스레 돌을 밟고 개울을 건너면 꽃 천지에 들 수 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허리 아래로는 온통 꽃 뿐이다. 사람 하나가 다닐만한 산책로를 꽃밭에 만들어 놓았다.
꽃 속에서 어느 정도 취하면 다시 개울을 건너 산사로 향한다. 도솔암까지의 구간은 가벼운 산행으로도 제격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석불을 볼 수 있다.
선운사 자체도 보물 덩어리이다.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500년 고찰이다. 창건 당시 89개의 절집에 3,000명이 넘는 승려가 수도했다는 대찰이었다. 지금도 전북 지역에서 김제의 금산사와 함께 가장 크다. 보물 5점, 천연기념물 3점, 전북 유형문화재 9점이 있다. 계곡에 내려가 절집을 감상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 굵은 나무들이 물 속에 그림자를 만든다.
영광의 불갑사는 선운사보다 더 오래 된 절이다.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들여온 이는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이다. 백제 침류왕 1년(384년) 영광 법성포로 들어온 마라난타는 법성포 인근 산 기슭에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불갑사이다. ‘이 땅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부처의 세상’이라는 의미로 절 이름이 불갑사(佛甲寺)이다. 원래 법성포의 이름은 아무포였다. 성인이 불법을 가지고 들어온 포구여서 법성포(法聖浦)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웅전은 보물 제 8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연화문, 국화문, 보상화문 등 문짝을 장식한 무늬가 화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느라 대웅전 주변에 쇠파이프를 박고 천을 둘러 놓았다. 아쉽다. 꽃무릇이 아쉬움을 대신한다.
불갑사의 꽃무릇은 선운사처럼 밀집해 피지는 않았다. 대신 색깔이 더욱 명징하다. 바라보는 맛이 그윽하다.
절 입구에서 불갑사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다. 바로 들어가는 길은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는 길, 조금 도는 길은 다리 오른쪽으로 난 계곡길이다. 모두 200㎙ 남짓 되는 길로 절 앞에서 만난다. 다리를 건너 절에 들어갔다가 계곡길로 나오는 것이 꽃을 보기에 좋다. 부도밭에 핀 꽃, 석등 앞에 핀 꽃, 계곡 물에 비친 꽃…. 다양한 모습의 꽃무릇을 볼 수 있다.
이 꽃은 9월말이면 진다. 꽃이 지고 나면 가을은 어떤 색깔을 입을까. 당연히 붉은 이뇩?절 주변의 나무 중 성급한 것들은 벌써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다. 꽃이 지면 가을은 더욱 붉게 타오를 것이다.
/고창ㆍ영광=글ㆍ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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