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부터 이라크 파병 요청을 받은 많은 국가들이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저마다 드높은 파병 반대 여론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파병에 따른 손익계산에 몰두하고 있다. 19일 UPI통신에 따르면 현재 32개국이 이라크에 파병중이며 추가로 14개국이 미국과 파병 협상을 벌이고 있다. 각국의 속사정을 정리해 본다.파키스탄 이라크인들의 정서적 반감에 고심하고 있는 미국은 무슬림 군대가 이라크에 투입되면 효과적인 치안유지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인 셈이다. 대표적인 두 나라가 파키스탄과 터키다.
1만∼1만2,000명 파병을 요구받은 것으로 알려진 파키스탄은 최후의 순간까지 주판알을 튕기는 모습이다. 당초 파키스탄은 유엔 결의안이 통과되면 가장 먼저 파병을 결정할 나라로 꼽혔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이미 6월 방미 당시 원칙적 파병 의사를 밝힌데다 대테러전 협력 대가로 미국이 지원을 약속한 30억 달러 상당의 '은전'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여서다.
하지만 국내 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강경 이슬람 성직자들은 "이라크에서 전사하는 파키스탄 군인은 순교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까지 경고하고 있다.
급기야 무샤라프 대통령은 21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여론 반전을 위해선 유엔과 아랍권은 물론, 이라크인들 스스로가 파키스탄의 군대를 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터키 1만∼2만명을 요구받은 터키는 파병에 적극적이다. 이라크전으로 경색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바랄 뿐 아니라 이라크와 맞닿은 남부 국경의 안정도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압둘라 굴 외무장관은 22일 조건부 이라크 파병 용의를 시사했다. 그는 이날 유엔에서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 의장을 비롯한 이라크 대표단과 회담을 가진 뒤 "파병이 외국군대에 의한 국가점령이라는 인식을 불식할 수 있어야만 터키군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역시 거센 반대 여론이다. 파병 승인권이 있는 이슬람 의회가 과연 흔쾌히 동의해 줄 지도 의문이다.
미국은 이날 이라크전 당시 불협화음으로 중단됐던 원조차관 85억 달러를 승인, 터키에 '당근'을 제시했다.
인도 130만 병력의 군사 대국 인도는 파키스탄과 대치중인 카슈미르 지역의 이슬람 반군세력에 대처해야 한다며 일단 난색을 표명한 상태다. 인도 언론들은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하고 있다. 인도 뉴인드프레스는 "하이테크 기술 이전과 파키스탄과의 카슈미르 중재 지원 등을 놓고 미국이 제시할 지원책에 따라 정부의 최종 결정이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러시아 이라크전을 반대했던 러시아는 미국이 요청하는 다국적군 참여에 대해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유엔이 승인하는 다국적군에 참가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면서도 "파병 문제는 아직 논의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슬람 체첸 반군을 잔혹하게 토벌한 전례가 있는 러시아군이 파병될 경우 이라크 대중의 거부감을 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브라질·네팔 남미의 좌파 정권 브라질은 지난주 미국의 파병 요구를 딱 잘라 거절했다.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그동안 미국의 국제정책을 강력히 지지해 온 네팔도 16일 "국내 공산주의 반군과의 전투로 병력을 해외에 파견할 수 없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서유럽·호주 1,200명의 추가 파병 방침을 밝힌 영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스페인 호주 등 기존 파병국은 더 이상 보낼 병력이 없다며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반전국 독일과 프랑스는 유엔 결의안 통과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며 파병에 냉담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지만, 국익을 명분으로 전격적으로 입장을 바꾸거나, 미국과의 이면 협상을 통해 더 큰 역할을 맡는 식으로 지원에 나설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동유럽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목말라 하는 옛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은 능력에 비해 의욕만 앞서는 형국이다. 이미 소규모 병력을 파견중인 리투아니아와 불가리아 등은 각각 50명 정도 추가 파견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낡은 장비와 병력 수준의 한계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2,700명을 파병해 이라크 치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폴란드는 날로 불안해지는 이라크 상황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 향후 움직임에 압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이라크 내전비화 가능성
게릴라전과 테러로 얼룩지고 있는 이라크 상황이 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예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현실화할 경우 이라크 국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물론 이라크에 주둔할 외국 군대도 무장 세력들과 사실상의 전쟁을 치루는 등 최악의 상황에 맞게 된다.
최근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현 이라크 상황이 15년간 내전이 지속되다 1990년 종식된 레바논과 유사하다고 진단했다. 종교적으로 시아파 이슬람과 수니파 이슬람이, 민족적으로 아랍민족과 쿠르드 민족이 각각 대결하는 현 이라크 상황이 그리스 정교, 기독교, 수니파, 시아파 등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던 레바논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또 미국, 이란, 사우디 등이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이라크 정정도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외세가 개입했던 레바논을 연상시킨다.
특히 내전의 주체로 부상할 수 있는 이라크 내 무장 민병대의 성장은 더욱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라크에는 현재 친 이란 성향의 시아파 이슬람혁명최고위원회(SCIRI)가 1만 5,000명 규모의 바르드 여단을, 모크타다 알 사드르를 중심으로 한 토착 강성 시아파들은 별도의 무장세력을 거느리고 있다. 여기에 쿠르드족도 7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수니파 이슬람 세력도 후세인 잔당 세력과 연합해 무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레바논 문제 전문가인 야흐야 사도우스키는 "이라크가 레바논 상황으로 악화한다면 주변국으로부터 민병대원들이 대거 몰려올 수 있다"며 "이 경우 이라크는 레바논 사태보다 더 악화돼 결국 '중동판 콩고'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예측은 국지적으로 현실화하고 있는 듯하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21일 게릴라 공격으로 미군이 물러나 권력 진공 상태가 조성된 바그다드 서쪽 팔루자시 등지에서 지역 자치 민병대가 경찰을 대신해 치안을 장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시아파 세력이 국민의 대다수인 60%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과 미군이 향후 상당기간 주둔할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내전 발발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