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서울은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지만 또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만큼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중국에서 인쇄소 운영을 통해 사업감각을 익힌 나는 건축관련 토목사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사업을 하기에는 경험과 밑천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동구공영'이라는 건축회사에 취직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건축업의 요체는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입찰권을 잘 따내느냐에 있다. 뇌물과 야합이 필수인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해방 직후 도급 입찰은 그야말로 야합의 극치였다. 한 공사에 보통 다섯 업체에 입찰권을 주었는데 입찰권만 받으면 공사를 최종 낙찰받지 못해도 떨어지는 게 있었다. 무조건 일정금액을 출연하는 조건으로 낙찰을 돌려가며 받았기 때문이다.
또 공사를 발주하는 관청, 특히 미군측에 얼마나 든든한 줄을 연결하고 있는가가 성공의 관건이었다. 때문에 영어가 특히 중요했고 독학으로 영어에 눈뜬 나는 회사에서 요직을 맡았다. 미군 관계자를 만나 뇌물을 주고 사업의 편의를 도모하는 업무로 매일같이 요리집을 전전했다. 일단 뇌물이 들어가면 목재나 시멘트 같은 자재가 뒷구멍으로 술술 나왔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크리스찬으로서 가장 타락한 시기였던 것 같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불의와 부정을 분간하지 못한 셈이다. 당시에는 그런 부끄러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하늘은 타락을 용서하지 않았다. 하루는 미군 트럭을 타고 일꾼들을 부평의 공사현장으로 데려가게 됐다. 운전은 통역을 맡은 한국인이 했는데 완전 초보여서 비가 온 뒤라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는데도 계속 과속을 해댔다. 아니나다를까 급 커브길에서 갑자기 차가 기우뚱하더니 논두렁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드디어 죽음이구나'하는 생각에 가족들 얼굴과 지난 일들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차는 아슬아슬하게 흙무더기에 비스듬하게 걸린채 멈춰섰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물론이고 다른 인부들도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가 도둑질보다 못한 일을 해온 게 아닌가. 돈벌이에 급급해 성경의 말씀을 어기고 제 멋대로 살아왔다. 하나님이 나를 깨우치기 위해 이련 시련을 주시는구나'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곤 '지금의 생활을 정리하지 않으면 평생 바르게 살기는 힘들겠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그 길로 1949년 해방 이듬해부터 시작했던 건축 청부업을 모두 정리하고 경기도 부천으로 이주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친구를 통해 약 4만평의 토지도 마련해 둔 터였다. 20대 초반까지 내 꿈과 땀을 바쳤던 땅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새 삶의 시작은 순조롭지 못했다. 당시 구입한 땅이 과거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에 '적산토지'로 분류돼 강제몰수돼 버린 것이다. 나는 토지대금을 치르고 정당하게 구입한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패소하고 말았다. 남은 방법은 정부소유가 된 땅을 불하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곳곳에서 뇌물을 요구하는 손길이 뻗쳐왔다. 손쉽게 처리해 줄 테니 급행료를 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타락과 부정이 싫어 땅으로 돌아온 내가 아닌가. 나는 유혹을 물리치고 교회의 간증집회 때마다 "뇌물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기독교인들부터 뇌물추방에 앞장서자"고 강조했다. 다행히 나의 결심을 알아준 세무사의 도움으로 구입한 땅의 절반을 불하받는 방식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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