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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09>金幽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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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09>金幽影

입력
2003.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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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9월22일 영화감독 김유영이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1940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몰(沒). 김유영은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영화계에 뛰어들어 나운규·윤백남·이규환 등과 함께 한국 영화의 토대를 닦았다.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계급 문예 운동에 대항해 1933년에 결성된 구인회(九人會)의 창립 동인 명단에 김유영이라는 이름이 보이지만, 영화인 김유영과 구인회 사이의 구체적 관련은 확인되지 않는다.오히려 김유영의 활동 공간은, 적어도 그 전기(前期)에는, 구인회가 적대시했던 카프의 영화부였다. 김유영의 두 번째 작품 '혼가(昏街)'에는 뒷날 카프 서기장을 지내게 될 임화가 출연했고, 도시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쟁의를 소재로 삼은 그의 세 번째 작품 '화륜(火輪)'을 카프의 문학비평가 안막은 '조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영화'로 꼽았다. 그러나 김유영이 이끌던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카프 영화부로 흡수할 것이냐의 문제에 대한 이견에서부터 '화륜'이 '영화예술의 볼셰비키화 임무에 충실치 못했다'는 카프쪽의 혹평에 이르기까지, 김유영과 카프의 관계가 늘 순조롭지는 않았다. 아무튼 1934년의 카프 제2차 검거 때, 피검거인 명단에는 김유영이 끼어 있었다.

김유영은 자신이 감독한 영화 '수선화'의 촬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었다. 가난과 폭음으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그는 이 영화의 촬영 현장을 수레에 실려 오가기도 했다. 1929년 김유영이 '조선지광'에 발표한 글의 일부는 1960년대에 시인 김수영이 한국 문학계를 향해 내던진 발언들을 문득 연상시킨다. "과연 우리에게 영화계라고 지목할 만한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에게는 영화계가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 시네아스트의 임무는 위선 우리의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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