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4당체제의 출범과 더불어 정치권에 내각제 개헌론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직접적 계기는 신당 창당에 따른 국회 의석분포의 변화다. 즉, 반노(反盧) 내지는 비노(非盧) 세력이 내각제 개헌안 통과선인 3분의2 이상을 장악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국회 재적의원(272석)의 3분의2는 182석인데, 한나라당 149석과 자민련 10석을 더하면 159석이다. 여기에 민주당 잔류파가 신당을 지지하는 전국구 의원 7명 등을 빼더라도 50명이 훨씬 넘어 이들 가운데 23명 이상만 찬성해도 개헌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산술적이나마 개헌의 여건이 이처럼 무르익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최근 여야 중진들의 내각제 언급이 잇따르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민주당 김상현 의원은 19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에 불안을 느끼면 내각제를 하자고 할 수 있다"며 "이것이 이 정부에는 가장 좋은 방향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한화갑 박상천 의원 등 다른 호남 중진도 내각제에 긍정적이다.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도 지난 주 "대통령이 진정 지역구도 타파를 원한다면 내각제를 고려해 보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일부 소장파를 제외한 상당수 한나라당 의원이 내각제를 선호한다는 것은 이미 구문이다. 자민련이 반색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김종필 총재는 얼마 전 사석에서 "내각제 개헌의 호기가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연장선에서 "내년 17대 총선 이전에 결판을 내자"는 주장이 나온다. 이번에 밀어붙이지 못하면 총선 이후 의석 분포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지금의 분포가 유지된다 해도 의원들이 개헌을 위해 자신의 임기를 몇년씩 줄이는 데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이와 관련, 홍 총무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빨리 (개헌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헌법상 개헌안 발의부터 국회 의결, 국민투표까지 필요한 기간은 최대 90일이어서 내년 4월 치러지는 총선 이전에 개헌을 완료할 시간은 충분하다.
개헌안은 국회를 통과한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절반 이상의 찬성표가 나오면 확정된다. 또 새 헌법의 발효와 함께 대통령의 임기는 중단된다. 일각에는 내각제로 바뀐다 해도 노 대통령의 나머지 임기 동안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게 하는 경과규정을 두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노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사망선고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
성급해 보이는 내각제 개헌론의 바탕엔 현정권에 대한 보수세력의 강한 불신이 깔려 있다. 한나라당 중진들은 "노무현식 통치가 앞으로도 4년 이상 계속될 경우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며 "내각제가 유일한 탈출구"라고 입을 모은다. 여기엔 물론 내각제를 하면 다음 대선을 기다리지 않고 권력을 장악 또는 분점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숨어있다.
그러나 개헌의 현실성은 그리 크지 않다. 아직 여론이 내각제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각제는 1990년 3당합당이나 97년 DJP연대가 그랬듯이 '정치세력간 야합' 또는 '권력 나눠먹기'라는 인식이 상당하다. 경제침체나 북핵 문제 등 긴박한 국내외 여건도 엄청난 정치폭풍을 부를 개헌을 입에 담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설사 국회에서 개헌안이 통과한다 해도 국민투표에서 노 대통령의 '중도하차'에 대한 역풍이 강하게 불 소지가 다분하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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