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이사벨은 미 동부 지역에 많은 상처를 남기고 소멸했다. 뿌리째 뽑혀 나뒹구는 나무들, 끊어진 도로, 깨진 유리창과 찢긴 지붕. 사망자와 이재민을 떠올리지 않고 침수된 가옥을 세지 않아도 이사벨의 분노와 앙탈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무엇보다도 수십만명의 주민들이 48시간이 지나도록 전기와 식수공급 없이 지새며 불안에 떨고 있다. 광풍이 몰아치고 난 다음의 모습만 본다면 우리와 미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사벨을 맞는 미국인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우리와 달랐다. 그들은 자연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그러기에 철저히 대비하고 진지하게 점검했다.
연방과 주의 방재 관련 기관 종사자들은 허리케인의 상륙이 까마득한 무렵부터 예상 이동 경로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고 주민들을 대피토록 하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침수 예상 지역 주민들이 모래주머니를 쌓느라 분주하게 움직인 때는 햇볕이 쨍쨍한 날이었다. 각 가정마다 비상식량, 손전등, 배터리를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상보다 인명 피해가 크지 않은 탓인지 너무 호들갑 떤 것 아니냐는 자성도 들린다. 한 칼럼니스트는 언론이 지나치게 주민들의 두려움을 자극한 데다 9·11테러, 스나이퍼 사건 등으로 공포심이 누적된 반응이라고 지적했다. 이틀씩이나 연방 정부와 학교가 문을 닫은 경위를 따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다 수긍이 가는 얘기다. 그러나 수마가 할퀴고 갈 때마다 '인재(人災)'타령을 하는 데 익숙해 진 우리에게는 이런 지적조차도 부러울 지경이다. 자연의 위력은 사람들의 노력을 무위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심술 앞에 굴복하지 않는 최선의 방책은 철저한 대비라는 것을 미국인들은 일깨워주고 있다.
김승일 워싱턴특파원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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