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름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프랑스인들이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9월, 서점가에도 신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약 700권의 소설이 첫선을 보이고, 비소설 분야에서도 약 600 권이 출판됐다. 인문과학서로는 '암흑시대' 등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아왔던 서양의 중세를 새롭게 조명한 책들이 일반인의 관심을 끌며 해마다 출판부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번에 나온 중세 연구서 중 '중세의 시(詩)와 신(神)에의 귀의'(PUF 출판사)는 중세 시뿐만 아니라 중세문학 전반의 비평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 주목되고 있다. 이 책은 중세문학 연구의 거장 미셸 징크(프랑스 학사원 회원·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썼다.지금까지 중세문학 연구는 중세인의 신앙이나 종교성은 배제한 채 표면에 드러난 문학적 요소만을 분석하는 구조주의적 방법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초 대표적 중세문학 연구가들이 작품 속에 숨어 있는 종교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데서 비롯되어 후세 연구자들에게 이어졌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중세문학에서 중세인의 신앙심을 배제하면 작품의 본질이 왜곡되기 쉽다. 중세인에게 신에의 귀의는 생의 의미이며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시와 신에의 귀의'는 인간의 정열적 사랑을 노래한 중세 시들이 어떻게 기독교 정신 속에서 잉태됐으며 당시의 시인이 예언자 역할을 했는지 보여준다. 서양문학의 모태인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에서 시는 신탁(神託)처럼 신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 시인은 필요없는 존재가 된다. 중세인들에게 모든 진리는 성경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0세기 동안 수도원을 중심으로 신을 예찬하는 문학만 꽃피고, 순수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 글은 부재하는 현상이 지속된다.
11, 12세기에 와서야 인간의 열정적 감정을 노래하는 음유시인들이 나타나면서, 시의 변두리에 머물렀던 사랑이 서양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시의 중심 주제가 되고, 시 자체가 사랑의 대명사가 되는 혁명이 일어난다. 시는 사랑의 가장 지고한 산물로서, 완전한 시는 완전한 사랑에서 우러나며, 사랑의 완성은 시로 구현되는 것이었다. 사랑의 돌출은 시에만 국한되지 않고, 소설로 확산되어 유럽의 중세문학은 사랑의 문학이 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시와 사랑의 관계가 기독교 정신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당시 수도원 문학과 비교해 분석한다. 중세 시에서 인간을 향한 정열적 사랑은 신의 사랑 속에서 가능했고, 신에의 귀의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예언자라 불린 중세 최고의 시인 단테는 불멸의 작품 '신곡'에서 영원한 여성 베아트리체에 의해 천국으로 인도되지 않는가? 중세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쓰인 이 책은 메말라가는 현대시에 시의 본질을 환기시키며 갈증을 해소해 준다.
조 혜 영 재불번역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