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병 지음 돌베개 발행·1만2,000원최한기(1803∼1875)는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조선 최후의 철학자이면서 주자학적 전통에서 보면 가장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1960년대 고 박종홍 교수에 의해 조명을 받은 이래 지금은 많은 선학들의 연구가 축적돼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 연구들과는 다른 자신의 목소리로 최한기를 말하고자 한다. "남의 혀가 아닌 내 혀로 말하고 싶었다." 이 기염은 필요하지만 실제는 드문 덕목이다. 그가 번역한 연암의 말처럼, 창신(創新)이면서 법도를 갖추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구의 이름으로 쉽게 여러 자료를 철습( 拾)하는 것으로 책무를 가름하고자 하고, 이것이 어느덧 습속이 되어 지금 학문의 큰 장애가 되어 있다.
그러나 창신의 모험에는 위험도 따른다. "기초 소양과 훈련의 부족으로 엄밀성이 떨어지고, 이를 현란한 수사나 공허한 논리로 가리는" 태만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그는 이 둘의 협곡을 피해가고 한 격식을 얻고자 했다.
자연히 그의 접근은 성찰적이고 비판적이다. 지금까지의 최한기 연구에 대해서도 그렇고, 최한기 사상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최한기 연구가 "근대주의의 추인과 정당화"에 맞추어져 온 것부터 비판하고, 시각의 초점을 옮길 것을 권한다.
그는 최한기 사유의 '가장 빛나는 대목'을 주자학과는 달리 인위(人爲)를 부각하고, 거기서 실용과 실무를 강조한 리얼리즘으로 본다. 최한기는 이 생각을 바탕으로 사실과 경험과 과학기술을 강조했고, 주자학의 폐단인 심성론, 경전주의와 붕당 등의 폐단을 넘어 '정치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유교의 전반적 갱신은 저자의 지적처럼 유교의 해체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측면이 있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한 최한기의 목소리를 더 깊이 음미하기보다 그 성취의 반대쪽 그늘에 렌즈를 들이댄다. 그는 최한기의 사고가 인문, 사회, 자연을 아우르는 기(氣)의 통일적 전망에 매달린 나머지 당시의 현실과 역사적 위기에 대한 주체적 대응에 소홀했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최한기의 실용주의가 문학을 위시한 인문학적 가치를 정당하게 배려하지 않았고, 인민을 정치의 주체로 긍정하지 않고 계몽 군주를 옹호했으며, 자신의 지구적 낙관주의가 야기할지도 모를 글로벌화의 폐단이나 성장지상주의의 문제 등을 예견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 밖에 그가 던진 많은 논제가 있다. 그는 이런 논제를 일정한 중심으로 배치하고 주장을 논증하기보다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여기가 이 책의 창신이 있는 곳이자 법고(法古)가 아쉬운 부분이다. 풀어놓았으니 수습하는 사람이 있어야겠는데, 나는 그가 "오랜 숙제 하나를 풀었다"고 안도하기보다 다시 떨쳐 일어나 최한기와 대화를 계속했으면 좋겠다.
"최한기가 깊이가 부족하고, 현상 너머를 사유하고자 하는 집요함이 없었다"는 저자의 지적은 동감이다. 그러나 그 얄팍한 지평이 바로 우리가 최한기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념의 과잉, 깊이의 신비가 우리가 운화(運化) 그 자체를 읽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운화를 읽는 것은 우리 삶의 필요와 요청에 의한 것으로 언제나 도구적 지평을 갖는다.
최한기의 요청대로 거기 한번 철저해 보면 어떨까. 그게 아니다 싶으면, 최한기가 고금(古今)을 차갑게 취사(取捨)했듯 우리도 최한기를 남길 부분만 남기고 미련 없이 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최한기가 그것을 원했다고 믿는다.
/한형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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