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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08>발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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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08>발미 전투

입력
2003.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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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9월20일 프랑스 샹파뉴아르덴주(州) 마른현(縣) 발미에서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프랑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할 전투가 벌어졌다.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과 그의 부관 프랑수아 켈레르만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카를 빌헬름 브룬스비크 장군의 지휘 아래 파리로 진격하던 프로이센군을 이 곳에서 맞아 패퇴시켰다.프랑스군 5만과 프로이센군 3만5천이 맞붙은 이 전투는 여덟 시간 만에 끝났고 양측의 전사자도 프로이센군 300, 프랑스군 200으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발미 전투는 프랑스 혁명을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만약에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승리해 파리를 장악했다면, 프랑스 혁명은 세 해 만에 좌초하거나 진로를 크게 바꾸었을 것이다. 이 전투에 참가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브룬스비크의 참모 가운데 하나였던 시인 괴테일 터이다.

괴테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던 터라 혁명 전쟁(프로이센측으로서는 반혁명 전쟁)을 회고한 '프랑스 원정'이라는 책에서 "이 시절의 프랑스는 혼란 속에서 진보의 평화로운 진행을 가로막고 있었다"라고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2년 9월20일을 기점으로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기꺼이 인정했다. 발미 전투 이틀 뒤인 9월22일 프랑스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했다.

발미 전투의 프랑스군 측에는 루이 필리프라는 이름의 19세 왕족 청년이 참가했다. 왕족이었으면서도 자유주의적 기질이 다분했던 이 청년은 당대의 절대 왕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830년 7월 혁명 뒤에 입헌 군주제 하의 왕위에 올랐다. 루이 필리프가 이끄는 이른바 7월 왕정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정이 수립될 때까지 이어졌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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