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찾아 서울로 올라온 것이 1935년 스물 두 살 때다. 농사로 단련된 탄탄한 몸에 한창 나이였다. 거칠 것도 없고 못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까. 서울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친구네 집은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목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젖소를 돌보고 우유를 배달하는 것으로 일과는 새벽 2시 반부터 시작됐다. 잠에서 깨는 대로 물을 길어다 쇠죽을 끓이고 축사청소를 마친 다음 우유를 짰다. 우유를 소독하고 병에다 나누어 담아 자전거에 실으면 배달준비가 끝난다.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 집에 배달했는데 사대문 안을 거의 다 훑고 다니는 고된 작업이었다. 우유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 오전10시, 재차 젖소와의 씨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목장 청소와 사료주기 등의 일을 마치면 오후5시로 하루 14시간 넘게 목장에 매달려야 했다.
일을 마치면 자전거를 타고 종로2가로 향했다. YMCA가 운영하는 야간영어학교를 가는 길이다. 공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서울에 정착한 뒤로 신학교 진학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까지 세웠다. 그러자면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데 다른 과목은 혼자해도 되지만 영어는 도저히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야간학교였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뒷정리를 하고 나면 밤11시. 눈을 붙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3시간 남짓이었다.
향학열로 버티던 고난의 행군은 그러나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반쯤 졸면서 자전거 배달을 하는 게 다반사였는데 어느날 큰 사고를 당한 것이다. 전차가 달려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급하게 핸들을 틀다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공부도 좋지만 이러다 사람잡겠다는 생각에 그 날로 친구집을 나왔다. 서울에 올라온 지 세달 반 만이었다.
대책없이 친구집을 나오다 보니 생활은 형편없었다. 나는 일거리를 구한다며 길거리만 쏘다녔고 어머니가 두부장사, 청소부로 나섰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린시절 고향에서 경험했던 절대빈곤이 두번째로 찾아온 셈이었다.
두번째 시련도 그러나 쉽게 풀렸다. 서울와서 사귄 선배 최병록이 사진관을 하고 있었는데 "내 밑에서 사진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고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사진사는 당시 최고의 직업 가운데 하나여서 열심히 잔심부름을 하며 사진기술도 익혔다.
그 때의 오싹한 경험만 아니었다면 나는 사진사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동경유학생이라는 두 사람의 의뢰로 북한산으로 출장촬영을 가게됐다. 약속장소인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둘을 만난 나는 이끄는 대로 북한산을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곳만 골라 다니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들마냥 초조한 표정을 짓는 등 행동거지가 어쩐지 수상쩍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날씨가 안 좋아 사진을 못 찍겠다"며 그대로 내려와 버렸다.
그러다 석 달쯤 후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정릉리 백골사건'이란 기사를 읽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따라 올라갔던 계곡 근처에서 돌무덤에 덮힌 어떤 사진관 주인의 시체가 발견됐는데 렌즈만 사라진 사진기도 함께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카메라 렌즈는 소 두마리 정도의 고가품이었다. 머리가 쭈뼛하게 서며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길로 나는 경찰서를 찾아가 그들의 인상착의를 말했고 경찰은 범인들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힘들고 고된 생활은 참을 수 있었지만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은 사실 견디기 힘들었다. 아직도 해로하고 있는 집사람 지명희(池明熹)를 만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집사람은 당시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신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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