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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9>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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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9>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입력
2003.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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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 국민은 헌법개정 발의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요지)."1973년 12월 24일 서울 종로2가 YMCA건물 2층 총무실에서 통일당 최고위원 장준하(張俊河·당시 55세·75년 8월 17일 사망)씨가 '개헌 청원운동 취지문'을 발표했다. 장씨를 필두로 함석헌 김동길 김수환 천관우 김지하 백기완 홍남순 등 30명의 서명이 있었다. 백기완(白基玩·당시 40세·백범사상연구소장)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민족의 성원이면 누구든지(대학생 연령층 이상) 서명하여 연령 및 시·도·군을 명기하면 된다. 30명 개개인이 청원운동본부이므로 누구에게나 보내주면 된다. 종합 집계는 장준하씨가 한다." 10월 유신 이후 개헌문제를 공개 거론, 국민발의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앞서 12월 13일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 함석헌씨 등 원로인사 14명은 민주수호국협의회가 YMCA 강당에서 마련한 시국간담회에 참석한 뒤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건의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유신정권은 일언반구의 반응도 없었다.

개헌청원 서명이 본격적인 시민운동 형태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이틀 뒤부터 였다. 26일 오후 5시 서울 명동 대성빌딩(흥사단 건물) 강당에서 '민족학교' 주최로 열린 '항일 문학의 밤'이란 행사가 열렸다. 함석헌 백기완 김지하씨 등이 강연을 하고 시를 낭독했다. 함석헌씨는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역사의 모태 속에서 항일 선열들의 뜻을 이을 아들이 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백기완씨는 "한국의 자유가 억압되고 경제가 어렵게 된 것은 일본의 한국지배에서 비롯됐다. 선배들이 벌였던 피의 항쟁은 우리의 투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가수 김민기씨가 등단, 민족시인 우덕순씨가 일본의 침략을 질타한 시 '네 뿐인 줄 알지 말라'에 곡을 붙여 노래를 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000여명의 대학생과 일반인이 강연장은 물론 건물 앞 도로까지 메웠다. 김민기씨의 노래가 끝난 뒤 장준하씨와 백기완씨 등이 '개헌 청원운동 취지문'을 나눠주었다.

당시 '민족학교' 대표로서 행사의 사회를 맡았던 김도현(金道鉉·60·현 한나라당 강서갑 지구당위원장)씨의 회고. "김민기씨의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여기저기서 유인물이 뿌려졌다. 백기완씨가 유인물을 들고 연단으로 올라섰다. 순간 강당의 모든 불이 꺼지며 마이크도 나갔다. 정전이 돼 버린 것이다. 백씨는 고함을 쳤다. '박정희 독재가 세상의 불을 꺼 버렸습니다. 불을 밝힙시다. 우리 모두 행진합시다.' 사람들은 성냥과 라이터 등을 꺼내 불을 밝혔다. 자연스럽게 촛불시위 형태가 됐다. 순간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그날 밤 9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시국에 관한 특별 연설'을 했다. 김 총리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행위"라며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거나 어지럽히는 행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지금 헌법을 고쳐야 되느니, 무슨 서명운동을 하느니, 민주를 회복해야 하느니 등의 행위는 삼가 해 줄 것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6·3사태 '3인방'의 일원이었던 김도현씨의 설명. "대학을 마치고 장준하 선생을 곁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장 선생은 박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으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관계'라는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그는 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으나 박정희만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72년)됐을 때는 민족적 의지인만큼 환영해야 한다며 오히려 우리를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10월 유신이 발표되자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후 장 선생은 개헌 문제를 자주 얘기했다. 그는 '개헌 요구는 사실상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하야할 경우 생명을 보장할 수 없으니 목숨을 걸고 유신헌법을 지킬 것이다. 따라서 개헌을 요구하는 우리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12월 29일 낮 이번에는 박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지각 없고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일부 인사들의 황당무계한 행동들이 국가안보에 누를 미칠까 염려된다. 한번 더 반성과 자제를 촉구하며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는 바이다."

해를 넘겨 74년 1월 8일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개헌 논의 금지)와 2호(비상군법회의 설치)를 선포했다. 15일 장준하씨와 백기완씨 등 개헌청원운동본부 30명 대부분이 검거됐다. 이들 중 장씨와 백씨만 기소돼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15년씩을 선고 받았다. 장씨는 복역 중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해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75년 1월 8일 장씨는 병상에서 '박정희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 발표했다. 그해 8월 17일 장씨는 경기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개헌운동" 구속 백기완씨

유신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선포였다. 유신의 성격은 두 가지다. 반민주적 분단독재이며 군사독재 이상으로 파쇼화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를 타도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물론 민족통일도 불가능해 진다. 백범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선생을 자주 만났다. 재야의 양심을 모아 반분단·반파쇼 투쟁을 일으켜 그것을 대중화해야 했다. 함석헌씨를 찾아갔다. "유신은 안 된다. 민주주의는 물론 민족통일의 토대마저 허물고 있다"며 개헌청원 운동의 뜻을 비췄다. 함 선생은 "할 만하구먼"이라고만 언급했다. 장 선생을 만나 함 선생의 '동의'를 전하고 김수환 추기경의 의중을 떠볼 것을 건의했다. 추기경의 적극적 동의를 얻어낸 장 선생은 "서둘러 여러 사람을 만나자"고 했다. 초안을 만들어 장 선생 구두 밑창 속에 넣어 주었다. 장 선생은 그 구두를 신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30명의 서명과 도장을 받고 둘이서 수락산으로 등산을 갔다. 장 선생은 일반인 상대로 서명을 받기 위해 초안의 내용을 좀 누그러뜨리자고 제안했다. 유인물 문장을 완성했으나 제작비가 없었다. 종로 5가에 있는 진명서림(당시 국내 최대의 책 도매상)에 가서 안광호 사장을 만났다. 우리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술 값이 없어 못 살겠다"고 했더니 두말 않고 서랍을 열어 돈을 꺼내 주더라. 70만원이었다. 인쇄 장비를 구입해 장 선생 집으로 갔다. 이대 교수로 30명 서명자에 속했던 김윤수(金潤洙·현 국립현대미술관장)씨 등이 있었다. 함께 밤을 새워 등사기를 돌렸다. 각자 50여장씩 나눠 갖고 아침에 YMCA 총무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새벽에 헤어졌다. 장 선생의 친구인 전택부(全澤鳧)씨가 YMCA 총무로 있었다.

12월 24일 아침 일찍 YMCA 총무실로 갔다. 조금 후 장 선생과 김 교수, 그리고 함석헌 선생, 김동길 교수 등 7∼8명이 왔다. 언론사에 연락했더니 외신기자들까지 몰려왔다. 낯익은 중정 요원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기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우리를 제지하지 못했다.

이틀 뒤 26일 명동 대성빌딩에서 '항일 문학의 밤' 행사가 있었다. 나는 김민기씨를 특별히 초청했다. 그의 주옥 같은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돼 있었던 때라 많은 사람이 모일 것으로 생각했다. 개헌청원 운동 취지문을 나눠주는 도중 갑자기 정전이 되는 등 약간의 소동이 있었으나 행사는 성대히 끝났다.

26일 김종필 국무총리에 이어 29일에는 박 대통령이 서명운동을 그만두라고 협박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30일 장 선생 등과 명동 모 다방에서 모였다. 우리는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계속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어 각 신문사로 전화를 했다. 연말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1월 4일 성명을 냈다. 나흘 뒤 대통령 긴급조치(1·2호)가 발표됐다. 개헌 운운은 물론 그 조치를 비난만 해도 15년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서명지는 특별한 양식 없이 백지에 이름을 쓰고 도장이나 지장을 찍은 것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모아 두었던 서명지를 소각했다. 장 선생도 그랬다. 그 때까지 우리가 모은 것이 15만명 가까이 됐다. 며칠 후 나는 잡혀갔다.

서명지를 내 놓으라고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다. 중정 6국에서 검찰 조서를 받았다. 검사 앞에서까지 헌병 2명이 총으로 나를 겨누고 있었다. 장 선생은 죽일 테면 죽이라며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너희가 모시는 사람이 일본군 중위 출신인데 나는 독립군 대위 출신이다. 내가 어떻게 너희들 조사를 받느냐"고 버텼다. 조사관들은 장 선생에게 통사정을 했다. 장 선생은 "백기완을 때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면 내가 조사를 받겠다"고 했다. 이후 나에 대한 매질이 없어졌다. 15년 형을 선고받고 75년 2월 소위 '위로 석방'으로 풀려났다.

장 선생은 제2의 운동을 준비했다. 박 정권은 월남 패망(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을 반공의 빌미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긴급조치 9호(5월 13일)의 명분이 됐다. 8월 17일 밤 장 선생의 아들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았다. 등산 갔던 아버지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갔다. 새벽 1시가 넘었다. 바위 위에 시신이 놓여 있었다. 내가 머리를 안아 드니 오른쪽 귀 뒤쪽에 선명한 타박상이 있었다. 겨드랑이를 누군가 꽉 껴안은 듯 심하게 멍든 자국이 있었다. 암살됐다고 직감했다. 전문가의 수법이었다. 빈소에서 문익환(文益煥) 목사를 만났다. 그는 장 선생과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와 함께 중국 만주에서부터 죽마고우였다. 얼마 후 문 목사를 만나 장 선생과 논의했던 '제2의 운동'에 관한 메모를 전했다. 그것이 76년의 '3·1절 민족 구국선언'이다. 주모자로 법정에 선 문 목사는 "죽은 친구 장준하를 대신해서 구국선언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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