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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74>소설가 심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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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74>소설가 심상대

입력
2003.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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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방영되는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헌터'를 보다가 글을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안젤라와 스티브의 결혼식 피로연 장면은 가히 감동적이다. 영화의 한 장면인데도 진짜 같다. 이와 같이 문학과 영화를 포함한 창조적 예술품은 거짓의 절정을 추구한다. 진실이라는 완벽한 거짓을 말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인생은 그 자체로 우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아함만이 거짓을 진실로 보이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우아함의 내막은 우연과 어쩔 수 없음이라는 생의 진면목을 허용하는 평정의 상태를 또한 요구한다. 이 얼마나 가혹한 사기술이냐.

내가 맨 처음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는 지금으로부터 백만 년 전이었다. 지질시대로 따진다면 그때 지구는 신생대 제4기 후반에 해당되고, 빙하기라고도 불리던 시절이었다. 원시 식충류로부터 진화한 영장류에서 인류의 조상이 막 출현한 뒤였다.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의 온난한 간빙기이던 그때, 나는 순록이라는 생물로 지금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태어났다. 지의류와 선태류만이 두 달 남짓 자라는 동토의 대지 어느 곳이었다. 나는 다른 놈들과 어울려 유쾌하게 언 땅 위를 뛰어다녔다. 지구상에 처음 태어난 나는 눈앞에 펼쳐진 경이와 신비에 빠져들어 한없는 즐거움을 만끽하였을 뿐 갈등이나 슬픔 같은 건 없었다. 발굽으로 잔설을 헤집거나, 꽃 이끼를 씹으며 툰드라를 천천히 산책하거나, 아무런 생각 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는 암컷이었다. 수컷보다는 작지만 내 머리에도 두 가닥의 뿔이 있었고, 손바닥 모양의 제법 굵고 긴 그 뿔 위로 눈발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며, 눈보라를 일으키는 거친 바람 속에서도 콧김을 푹푹 내뿜으면서 수컷의 성애에 기뻐하였고, 얼어붙은 툰드라 위에 네 발굽을 뻗대고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나는 얼어붙은 지구 위에 몸을 눕힌 채 우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수만 마리로 이루어진 순록의 무리가 우주로 떠나가는 나를 뒤로 한 채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뒤 오랫동안 나는 지구를 생각하지 않고 어둠 저편 우주의 밀실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인간의 문자로 표현하자면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대해서는 더 이상 형용할 수 없고, 형용하지 않는 게 또한 정직한 짓이다. '나'라는 존재도 개념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나'라는 존재가 다시 생겨났으며, 이는 지구라는 '곳'과의 연관성이 마련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 삶을 마친 지 구십 구만 년 뒤, 나는 두 번째로 지구 위에 다시 나타났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일만 년 전이었다. 지중해로 흘러드는 나일강 가 삼각주 기슭에 갈대의 일종인 한 포기 파피루스로 태어난 것이다. 비옥한 삼각주의 한 쪽에 뿌리를 박고서, 싹을 틔우고, 짙은 녹색 줄기를 세우고, 담갈색 이삭을 열고, 그리고 바람결에 온몸을 흔들면서 햇볕을 즐겼다. 그렇게 피어나고 흔들리고 시들어 땅에 떨어지는 한해살이를 천 년 동안 계속하였다.

그 동안 지구 위에서는 인간들의 영욕이 수없이 부침하였지만, 나는 단지 한 포기의 파피루스로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아침이면 어김없이 솟아올라 온 하루를 쏟아져 내리는 햇볕을 즐길 뿐이었다. 산다는 것이 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 내 허리를 감싸며 흘러가는 나일강의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었다. 실로 나일강의 강물은 저 멀리 청나일과 백나일로부터 내게로 다가와서는, 겨우 나를 잠깐 흔들다가는 지중해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물의 흐름을 천 년 동안 지켜보면서 가만히 흔들리고만 있었다.

나일강의 범람과 폭발적으로 진보한 인류의 문명이 일으킨 소란이 아니더라도 천 년의 세월은 피로할 만큼 길었다. 나는 다시 어둠 저편 우주의 밀실로 돌아가 잠을 잤다. 그 긴 침묵의 시간 동안 무얼 했느냐고? 육천 오백 년 동안 잠을 잤을 뿐이다. '나'의 잠과는 달리 꿈도 없는 잠이었다. 제기랄! 그 없는 듯이 있는 시간에서 벗어나자 나는 또다시 지구가 그리워졌다. 서기력 기원전 오백 년 무렵이었다.

이번에 나는 인간이라는 시끄러운 생물의 대열에 끼어 들어 그 중에서도 가장 매력 있는 직업을 택했다. 말 등에 올라타고서 초원을 내달리며 나와 같은 인간을 상대로 거래하는 직업이었다. 상대방에게는 죽음을 주고 그들로부터 재물을 받는 나는, 가슴이 온통 붉은 털로 뒤덮인 도둑의 왕초였다. 낙타가죽으로 만든 짧은 바지를 입고, 검은 갈기 휘날리는 몽고말의 잔등에 올라앉아, 붉은 털과 땀방울로 뒤덮인 가슴을 흙먼지에 더럽히면서, 피와 재물을 가진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영역은 아주 넓었다. 고비 사막에서 톈산(天山) 산맥에 이르는 지역이 나의 '곳'이었으니까. 스물 두 명의 졸개도 있었다. 졸개들에게 나는 소리 질렀다.

"소리 질러라, 소리를 질러!"

세상이 너무나 조용해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인간의 목에서 솟구쳐 오르는 붉고 뜨거운 피에 팔뚝과 뺨을 적시며 나는 소리 질러댔다.

"소리 질러라, 소리를 질러!"

마유(馬乳) 치즈를 들고 달아나는 어린 처녀의 배를 가르자 그녀의 뱃속에서 내가 갈망하던 소리가 들려왔다.

"휴…"

정말 멋진 소리였다. 기뻤다. 아아, 소중하고 즐거웠던 마적의 시절이여. 나는 충실했고 자유로웠다. 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살았으면 됐지 왜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났던가. 그 다음부터는 실수의 연속이었다. 그 뒤 제국과 하렘을 거느린 술탄으로 보낸 삼십 년의 생이나, 파리 뒷골목에서 노래를 부르고 몸을 파는 집시 여인으로 살았던 이십오년의 생이 바로 그러했다.

내가 다섯번째로 지구 위에 나타난 '때'와 '곳'은 부르봉 왕조 말기의 프랑스 파리였다. 혁명 발발 뒤 루이 16세가 퇴위하고 나폴레옹이 등장했던 어수선한 시절, 나는 탬버린과 허리를 돌리며 거친 춤을 추거나, 카덴차풍의 춤곡을 연주하면서 독한 담배를 피우거나,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높은 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고도 모자라 술 취한 남자의 여드름투성이 엉덩이를 혀로 핥고, 더럽고 어두운 뒷골목에 쓰러져 토악질을 해댔다. 저주스러운 삶을 살았고, 삶을 저주했으며, 영혼을 비틀며 흘러나오는 그러한 저주를 노래로 불렀다. 파리의 하늘이 차갑게 얼어붙은 어느 겨울날 밤, 다시는 지구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돌아가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때'와 '곳'은 어둠 저편에 있는 침묵의 시간 뿐이었던 것이다.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않으려 했다. 그런 내가 왜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하필 소설가라는 직업인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가끔씩 이상하게만 여겨지는 '나'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번만큼은 절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나는 내 자신이 원해서 이곳에 태어난 것도, 이때에 태어난 것도, 문학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다. 내가 아니라 문학이 고단한 나를 이 땅으로 불러냈음이 틀림없다. 나로서는 이 세상에 아무런 욕심도 원한도 없다. 단지 문학이 나를 탐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내 지난한 생애를 다 적었는데도 TV에서는 여전히 '디어헌터'가 계속되고 있다. 군복을 입은 마이클이 침대에 누운 안젤라의 뺨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고 있다. 정말 길고 지루하며 그럴 듯한 영화다. 한편으로는 인간과 세상의 생김새를 형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적 예술가가 지녀야 하는 우아함에 대해 설명하려 애쓰고 있는 영화다.

● 약력

1960년 강원 동해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중퇴·상지영서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0년 계간 '세계의 문학'에 단편소설 '묵호를 아는가' 발표 등단 소설집 '묵호를 아는가' '명옥헌' '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섯 편의 소설' '늑대와의 인터뷰' '떨림' '심미주의자' 등 현대문학상(2001) 광희문화상(2003)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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