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종전 직후인 1953년 9월18일 공산주의 운동가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대에게 사살당했다. 47세였다. 이현상이라는 이름이 일반인에게 익숙해진 것은 정치인 이우태(李愚兌)가 이태(李泰)라는 필명으로 지난 1988년에 펴낸 자전 소설 '남부군(南部軍)'을 통해서일 터이다. 이우태는 6·25 전쟁 중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흔히 남부군으로 불리던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 대원으로서 전사(戰史) 편찬을 담당했는데, 이 남부군의 사령관이 이현상이었다. 이우태의 눈에 비친 이현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자,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이자, '외로운 방랑자'였다.충남 금산 출신의 이현상은 서울 중앙고보에 재학하던 1925년 조선공산당 건설에 참가한 이래 투옥과 지하 운동, 빨치산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며 평생을 견결한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보성전문학교 법과 재학 시절 반일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 구속된 이현상의 일본 경찰 신문 조서에 따르면, 그는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했고, "극렬한 사회주의자로서 개전의 가능성은 없"었다. '개전의 가능성이 없다'는 일경의 판단은 옳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앞 다투어 전향하던 일제 말기에도 이현상은 꿋꿋했고, 해방 얼마 뒤 남한에서 공산당이 다시 불법화되자 월북해 잠시 평양에 머물다가 1948년 당의 결정으로 월남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현상과 그의 동료들이 풍찬노숙하며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적어도 오늘날의 북한과 같은 세상은 결코 아니었을 터이다. 그 점에서 북한 지도부는 죄를 저질렀다. 그런 정치적 일탈 이전에도, 그들은 지리산 전사들을 방기해버린 죄를 저질렀다. 아무렇거나, 지리산은 민족의 원혼이 흐느끼는 곳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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