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 중앙동 밝음신협 건물 3층에 자리잡은 병원에 들어서면 '웃으면 건강해집니다'라는 파란색 판이 눈에 띈다. 그 맞은편 벽에는 환자가 자기 권리를 잘 챙겨받으라는 '환자의 권리장전'이 크게 붙어 있다. 이곳에서는 가벼운 관절염 환자는 주사나 약 대신 요가교실에 다니라는 처방을 받는다. 한의원에서는 한약이 아니라 유기농산물로 섭생을 바꾸라는 진단을 내린다.온갖 첨단 장비를 들여놓고 첨단장비에 들어간 돈을 뽑기 위해 고가의 진단과 처방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정말 이상한 병원이다. 이곳의 정확한 이름은 '원주 의료생협 밝음의원·밝음한의원'. 의료기관의 바른 길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전국 10개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해 5월에 조합원 540가구가 모여 창립총회를 가졌고 11월에 병원문을 열었다. 양의 1명과 한의 1명 간호사 1명이 있는데 하루 70명 정도가 찾고 있다.
원주시 호저면 광격리에서 더덕농사를 짓는다는 장숙희(40)씨는 속이 아파서 왔는데 허리디스크와 관절이 나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 한원상(42)씨로부터 역시 간단한 운동요법을 처방받았다. 간호사 김광숙(46)씨가 장씨에게 직접 요가체조 시범을 보인다. "발목을 천천히 구부려주세요. 이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풀어주세요." 농사 지으면서 살다보니 늘 몸이 아프다는 장씨는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보고 물리치료도 받고 침도 맞았지만 낫지 않았다. 주위에서 여기가 잘 고친다기에 왔다"며 "잘 고치는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정말 친절하다"고 웃는다.
의료생협은 지역 사람들이 건강 의료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조합형태로 만든 주민자치 의료기관. 1994년 안성을 시작으로 7개 의료생협이 현재 활동중이며 전주, 함께걸음 장애우, 청주 의료생협이 발기인 대회를 마쳤다.
인천평화의료생협이나 대전의료생협처럼 의료인들이 먼저 조합을 결성, 주민들에게 동참을 권유한 형태가 있는가 하면 서울의료생협 안산의료생협처럼 지역주민들이 생협을 만들어 의료인을 초빙한 경우도 있다. 최초의 의료생협인 안성의료생협은 지역주민과 의료인이 함께 만들었다.
원주의료생협은 지역민들이 만들어 의료인을 초빙한 경우. 이 곳의 신용협동조합과 원주 한살림, 성공회 나눔의 집, 의사모임인 '새실로 하늘짜기' 등 지역모임과 회원들이 9,000만원을 출자했다. 특히 회원이 5만명이 넘는 밝음신용협동조합은 건물 1개층을 무상 임대해주었을 뿐 아니라 창립자금 2억원을 대출해줘 대들보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국민개보험시대에 의료생협이 따로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원주의료생협 최혁진(33) 기획실장은 "의료라는 공공서비스를 90% 이상 민간의료기관에 의존하고 민간의료기관은 영리기관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참다운 의료기관의 길을 가려는 의료생협이 할 일은 무척이나 많다"고 말한다. 원주의료생협이 내건 세가지 목표, '건강한 사람을 건강하게' '차별없는 진료' '환자의 권리장전 중시'는 실상 모든 의료기관이 당연히 지켜야 할 덕목. 그러나 실천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의사가 몇 분 간격으로 환자들을 처리해줘야 병원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생협에서는 의사들이 환자 이야기를 서둘러 듣고 알아보기 힘든 처방전을 내리는, 무례한 진료행위가 전혀 없다. 환자가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를 설명해주고 환자의 궁금증에 일일이 답해준다.
무엇보다도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다. 이를 위해 원주의료생협은 성인병 교실을 비롯한 다양한 월례강좌를 열고 있다. "공해 흡연 직장에서의 과로 빈부격차 같은 사회적 문제는 필연적으로 질병을 낳는다"며 "환경호르몬 문제부터 반전평화운동, 생태운동 같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과 대안을 가르친다"고 최 실장은 말한다.
원주의료생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은 '차별없는 진료'를 위한 다양한 활동이다. 국민개보험 시대라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병원 문턱은 여전히 높다. 무상진료 혜택에서 비껴난 이들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무상진료 혜택을 받는 이들도 병원을 오가는 시간이나 교통비가 부담스럽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빈민들이 병원에 가면 한 두달치 약을 한꺼번에 타내려고 한다. 차도가 있어도 그에 따라 달라지는 처방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의료생협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 '찾아가는 진료'. 원주의료생협의 의료진은 오후 7시에 병원 진료가 끝나면 다시 왕진가방을 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연세대 원주의대 출신으로 서울에서 봉급의사 생활을 하다가 모두 접고 내려온 한씨는 "힘들기는요. 당연히 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의료제도의 모순 때문에 의사가 소신을 갖고 일하기 힘든데 의료생협은 그런 점이 가능해서 오히려 마음은 편하다"고 한다.
원주의료생협이 찾아가는 가정은 50여 가구. 대부분 독거노인이다. 성공회 나눔의 집의 자원봉사자들이 반찬거리를 들고가 목욕 청소를 해주고 연세대 원주의과대학의 봉사동아리인 '새실로 하늘짜기'에서도 동참한다. 이들이 찾기 전까지는 의사라고는 2년전에 만난 것이 고작이고 다달이 보건소 간호사로부터 약만 받아먹던 폐질환자도 있었다. 자원봉사자인 가정주부 정종숙(39)씨는 "처음에는 마음을 터놓지 않던 할아버지가 나중에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느니 죽으려고 했다. 이제는 정말 사람대접 받는 것 같다'고 했을 때는 눈물이 핑돌았다"고 말한다.
원주의료생협과 성공회 나눔의 집에서는 찾아가는 진료와 묶어서 가난한 이들이 봉사를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홈헬퍼 사업도 추진중이다. 가난하지만 몸은 건강한 이들에게 간병인 역할을 가르치고 이들이 의료생협의 찾아가는 진료에 동참하면 일당으로 1만원 정도를 준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기금이 나온다. 나눔의 집 박준영(29)간사는 "간병인으로 일하는 방법을 잘 배우면 가사도우미로 자립하는 길을 일러줄 생각"이라고 말한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서 나아가 가난한 이들끼리의 자립 자활모임을 만들어낸다는 장기적인 구상인 셈이다.
원주의료생협의 가장 큰 고민은 재정적자. 의료 사각지대를 도우려면 재정이 안정되어야 하는데 조합원들은 건강하고 과잉진료도 않다보니 그만큼 병원살림은 쪼달린다. 김승환(44·목사) 이사장은 "밝음신협의 재정지원으로 버티고 있으며 2년내로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한다.
환자들이 스스로의 권리에 둔감한 것도 바로 잡아야 할 과제. 상지대 한의대 출신으로 원주에서 잘나가는 '몸바탕 한의원'을 접고 이곳에 합류한 한의사 공인표(36)씨는 "현대병이 대부분 생활패턴병이라서 섭생을 고쳐야 낫는데 의사가 섭생을 바꿀 방법을 제시해도 약이나 건강보조식품으로 단번에 해결하려고 한다. 공급받는 데만 익숙해진 의료소비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양의도 마찬가지. 한씨는 "주사를 왜 안 놓아주느냐, 감기약 알 수를 따지며 '여기는 왜 이렇게 적으냐'며 따진다"며 항생제에 찌든 환자들을 설득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이들이 지켜주는만큼 의료소비자들의 의식이 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환자의 권리장전
환자에게는 투병의 주체자로서 아래와 같은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1. 알권리 병명, 병상(검사결과를 포함함), 병의 진전 예측, 진료계획, 치료와 수술(선택의 자유와 그 내용), 약의 이름과 작용, 부작용, 필요한 비용 등에 대해 납득될 때까지 설명을 받을 권리
2. 자기 결정권 납득될 때까지 설명을 들은 뒤 의료 종사자가 제안하는 진료 경과 등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
3. 개인 신상 비밀을 보호받을 권리 개인의 비밀이 지켜질 권리 및 사적인 일에 간섭받지 않을 권리
4. 배울 권리 병과 요양 방법 및 보건, 예방등에 대해 학습할 권리
5 진료받을 권리 언제든지 의료서비스를 사람으로서 알맞은 방법으로 받을 권리
6. 참가와 활동 환자 스스로가 의료종사자와 힘을 합쳐 이들 권리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갈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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