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가 팀장으로 온다니까 다들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더군요. '국가대표선수는 어떻게 일하나 보자', 이런 마음도 있었겠죠. 그러나 저는 딱 한가지만 생각했습니다. '온 나라가 채권연체 때문에 어렵다. 전직 국가대표 선수답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자'라고요."한국 배구 최장신 세터(195㎝)로 '특급 라이트' 후인정, '블로킹 왕' 방신봉과 함께 '높이배구의 3대 지존'으로 불렸던 전 국가대표 배구선수 진창욱(32)씨가 금융기관의 채권회수 전문요원으로 변신했다. 2001년 9월 현대캐피탈 배구단에서 갑작스럽게 은퇴한 그는 현대캐피탈 상계지점 여신팀장을 거쳐 올해 4월부터 마산채권센터 채권관리팀장으로 후배 직원 14명과 함께 프로 금융인의 새 삶을 살고 있다.
은퇴 당시 신문에 보도됐던 사유는 '어려운 집안 사정문제'. 그러나 그는 연대보증으로 인한 마음고생과 경쟁 팀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20년 동안의 선수생활을 접었다고 한다. "운동선수는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보증 서줘 물린 것이 한 1억원 됐습니다. 1998년부터 3년 동안 이것 갚느라 마음고생이 심했죠. 또 삼성화재 배구단에 6연패를 당하니까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마음이 없어지더군요. 스포츠에는 1등만 존재하거든요."
미련 없이 배구코트를 떠난 그는 소속사인 현대캐피탈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상계지점 출근 첫 날부터 회의가 시작됐지만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바람에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다. "덩치라도 작으면 눈에라도 안 띄죠.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당시 지점장이 이러는 겁니다. '진 대리, 뭐 알겠어?' 그때부터 회사 연혁과 여신심사 과정 등을 지점장한테 일일이 배우면서 '제2의 진창욱'이 된 것입니다."
채권회수를 전담하면서는 안타까운 일이 더 많았다. 후배 직원들의 채권회수를 독려하는 한편, 급할 때는 직접 전화를 걸거나 방문을 통해 연체채권을 받는 과정에서 쓰라린 비애도 많이 느꼈다. 특히 가족 명의로 몰래 대출을 받은 후 갚지 않아 형제가 법정싸움까지 가는 경우가 가장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그렇지만 연체로 인한 신용불량자 해법에 대한 그의 답변은 그야말로 쾌도난마다.
"나라에서 도와주면 절대 안 됩니다. 자기가 분수 모르고 쓴 것을 왜 남이 도와줘야 합니까? 월급이 100만원인데 2,000만원짜리 자동차를 사려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아요. 36개월 할부일 경우 매달 67만원이 들어가는데 그러면 남은 돈으로 어떻게 살 수 있어요? 선수 시절 외국에 나가보니 외국 선수들은 햄버거 하나만 먹고서도 서너 시간 너끈히 뛰더군요. 그런데 우리는 최소한 불고기 10인분 정도는 먹어야 제대로 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식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는 현재 삶이 만족스럽다. 운동은 초등학교 4학년 아침 조회 때 배구감독이 "야, 뒷줄에 키 큰 놈, 배구 해라"라고 해서 시작했지만, 지금 업무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캐피탈 상계지점 취급고가 경쟁사를 앞지를 때면, 선수시절 삼성화재에 계속 당했던 일이 생각나 더욱 통쾌하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감독이나 코치로 다시 코트에 서고 싶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몸 관리를 하면 40세까지는 할 수 있거든요. 성균관대 재학시절부터 배구 코트를 따라다니며 저를 응원해줬던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그 꿈은 버리지 않을 겁니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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