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디를 가도 코카콜라 광고와 마케팅 기법은 비슷하다. 그러나 최근 다국적 기업인 코카콜라는 마케팅 전략을 수정, 일본법인부터 그 나라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도록 했다. 이른바 로컬화다. 상품을 소비하는 지역 주민의 취향에 맞게 수정하는 전략이야말로 어쩌면 글로벌 시대의 불황을 돌파하는 생존 방식이라는 생각 때문이다.통합된 것은 분산되기 마련이다. 특별한 설명이 없다면 ‘서울 어느 곳’ 쯤으로 설정되던 영화 속 배경이 분산되고 있다. 한국 영화가 로컬화를 서두르고 있는 것. 우리 역사, 그 속의 인물이 영화 전면으로 나오고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 ‘목포는 항구다’ ‘황산벌’ ‘효자동 이발사’….
'로컬'로 70년대를 이야기하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유하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로 서울 양재동 말죽거리 고교생들의 추억을 더듬는다. 1978년 유신 말기, 개발붐을 맞은 강남의 한 고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고교생 군상을 드러낸다. 땅값이 오를 것이라는 어머니의 성화로 전학하게 된 현수(권상우)라는 남학생이 주인공.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한 복고 영화라기보다는 ‘잔혹사’라는 말을 덧붙여 시대의 폭압이 어떻게 고교생에게 폭력성을 관철했는가를 드러낼 예정이다.
송강호 문소리 주연의 ‘효자동 이발사’(감독 임찬상)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발사가 졸지에 대통령 전속 이발사가 되면서 겪는 인생의 혼란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이야기로 60ㆍ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혹독했던 시대 분위기를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내년 2월께 개봉된다.
'로컬'로 옛 전쟁을 이야기하다
백제 멸망의 고비가 된 황산벌 전투를 그린 ‘황산벌’(감독 이준익)은 황산벌이라는 역사 속 실제 지명을 영화 제목으로 쓰며, 660년 7월9, 10일(음력)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를 담았다. 감독의 변은 이렇다. “1,300년 전 황산벌 전투에는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이 개입했다. 2차대전보다, 6.25보다 큰 전쟁이다.
아시아 역학 관계 속에서 ‘로컬’ 혹은 ‘변두리’였던 한반도의 정세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말했다. 그는 또 “영국, 일본, 프랑스 등이 그랬듯, 자국 역사를 영화라는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문화 선진국의 기준”이라는 말로 영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 영화는 촬영을 마치고 현재 후반 작업 중이며 10월13일 개봉한다.
로컬은 서울 중심 패러다임을 깬다
‘목포는 항구다’(감독 김지훈)은 서울 토박이 형사(차인표)가 목포의 대규모 조직 폭력배(조재현)을 잡기 위해 조직에 위장 취업한다는 내용으로 걸쭉한 목포 사투리가 전면에 부각된다. 김지훈 감독은 “목포는 정치적으로는 한(恨)의 도시이며 사회적으로는 건달의 메카다. 영화는 본질이 왜곡되어 있는 목포의 정서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휴먼 코미디를 그릴 것”이라고 밝혔다.
감독은 “다양한 종류의 영화 ‘춘향전’에서도 양반들은 표준말을 쓰고, 사투리는 상것들이나 쓴다”며 “그간 주변부, 변두리로 이해되는 사투리와 지방의 문화를 조명해 보고 싶다”고 작품의 철학을 말했다. ‘친구’ 이후 사투리 영화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투리가 갖는 전복성에 주목한 결과이다. 이 영화는 9월말 촬영을 마치고 연말께 개봉할 예정이다.
로컬은 한국 영화의 '심도'의 상징
이들 영화는 요즘 관객들의 취향을 고려, 코믹 터치를 더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영화계의 평가는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실제했던 것, 혹 그랬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야기를 통해 사실이 현실보다 더 기막힐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라며 “한국 영화가 현실과 역사에서 소재를 찾는다는 청신호로 받아들여진다”고 평가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식의 상징적, 문학적 제목이 유행한 반면 요즘 영화는 소재와 주제를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며 “자기 역사, 자기 인물에 주목하면서 ‘로컬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매스 미디어’가 아니라 개인 휴대전화나 PC를 통해 빠르게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는 요즘의 ‘내로 미디어’ 시대에 구체적인 지역, 시대에 살고 있는 생생한 인물의 얘기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시대의 반영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가리봉동 순이’ ‘송정리 이 실장’ 등의 영화 제목이 나올 만하다는 얘기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제목 따로, 촬영지역 따로
과거를 배경으로 한 로컬 영화의 가장 큰 고민은 찍을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것. ‘말죽거리 잔혹사’의 진짜 무대는 말죽거리. 그러나 말죽거리, 즉 현재의 양재역 일대는 이미 번화가로 변해 투기 바람이 불던 70년대 말의 분위기를 연출하기란 불가능하다. 제작사인 싸이더스는 전북 전주, 정읍에서 촬영하고 있다. 아파트 몇 동과 막 포장된 길이 영화에 제격이다.
‘효자동 이발사’ 역시 서울 효자동에서 촬영이 불가능해 제작사인 청어람은 전북 완주군 봉동읍 과학산업단지 공터에 500평 규모의 세트를 지었다. 당시 효자동은 청와대에 인접해 있어 엄격히 개발이 제한된 지역. 전주, 완주 일대는 영화 촬영장으로 부쩍 각광을 받는 지역이다. 전주영상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데다 평야가 넓어 구한말부터 80년대까지 다양한 시대상을 구현할 세트를 짓기에 적합하다는 평이다.
액션 사극 ‘황산벌’도 실제 황산벌인 충남 논산시 연산면 대신 부여군 낙화암 일대에서 촬영했다. 논산 일대는 이미 논과 밭 뿐 벌판이 없어 영화 촬영에 적합하지 않았다. 부여에는 영화 촬영에 적합한 나대지가 많아 이 지역을 택했다. 촬영장이 부여군 소유 공유지이며, 부여군은 보도블록과 전신주를 제거, 적극적으로 촬영을 지원했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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