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30도의 날씨에 웃통을 벗고 맷돌을 매단 채 산에 올라가겠다고 했더니 연출부가 슬금슬금 피하더라.”김기덕(43)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이단아다. 그가 아홉 편의 영화에서 보여준 기괴한 이미지와 그로테스크한 세계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열띤 지지자 못지않게 ‘자궁에서 도 닦는다’고 맹비난하는 비판자도 많은 극단적인 세계다. 한겨울에 산정에 오르는 장면을 찍겠다는 감독을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결국 그는 점심을 먹고 스태프 모두를 이끌고 4시간 동안 등산로도 없는 험한 주왕산 계곡을 타고 올랐고, 이 장면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김기덕 다운 가학, 또는 자학적 도착의 이미지 대신 달관한 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는 이 작품이 “지금껏 만든 여덟 편이 낱낱의 그림이었다면, 이 작품은 그 모두를 아우르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폭로에서 은유로
한 달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빨리 찍는 것으로 유명한 그이지만 이번 작품은 산사의 사계를 담아야 하기에 1년을 찍어야 했다. 단풍이 물들고,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어는 사계의 변화 속에 단청은 빛이 바래고, 어린 동승은 성(性)에 눈뜨고 아들을 기른다.
살을 발라낸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섬’) 등의 노골적 이미지보다 상징과 비약을 통해 사계와 인생의 흐름을 그려내려 했다. “스님이 가을에 배에서 다비식을 치르고, 주인공이 겨울에 찾아와 배에서 사리를 꺼낸다. 계절의 바뀜이 세대의 흐름으로 읽혀지길 바랐다.”
나쁜 아버지에서 좋은 아버지로
‘악어’부터 ‘해안선’까지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는 폭력적 부성이다. 그의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착취하고(‘파란 대문’), 장교와 사병이 한 여자를 폭행하는(‘해안선’) 악마적 부성에 대한 탄핵이다. 김 감독은 그러나 거의 처음으로 너그러운 아버지상을 노스님을 통해 보여준다.
“예전에는 아홉 살 난 딸에게 다그치고 혼냈지만, 이제는 설득하려고 한다. 예전에 아버지로부터 ‘담배 피우지 마라’ ‘공장 가서 일하라’ 식의 일방적 명령을 받았지만 지금의 나는 많이 다르다. 동승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려 했던 이유도 그렇다.”
우울에서 웃음으로
폭력의 순환으로 일관하던 그의 우울한 세계에 모처럼 웃음과 햇살이 비치는 것도 이번 영화의 특징. 김기덕 감독이 직접 장년의 주인공을 연기한 것도 이채롭다. 출연료(200만원)까지 받았다.
4계를 인생과 비유한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비관이 아니라 긍정”이라는 니체 식의 잠언을 보탰다. “물고기와 개구리를 괴롭히던 아이가 커서 아버지가 돼도 그의 아이 역시 짐승을 괴롭힐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악에서 선으로 가는 역사라면 벌써 이 땅이 천국이어야 하지 않는가.”그러나 그의 말투는 분노가 아니라 40대에 체득한 지혜처럼 들렸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봄 여름…'은 어떤 영화
봄은 아이, 여름은 청년, 가을은 장년…. 사계절을 인생의 여정에 비유한 김기덕 감독의 신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오랜 풍상을 겪은 풍경화 또는 빛 바랜 탱화 같은 영화다.
김 감독은 난폭한 이미지를 통해 관객의 깊은 의식에 생채기를 만들어 왔다. 이번 영화에선 주왕산 국립공원 주산지 호수 위에 지은 암자 한 채의 사계를 통해 인생에 대한 한결 원숙해진 자신의 통찰을 보여준다. 꽃이 지고 피고, 뱀이 교미를 하고, 단풍이 물드는 자연현상과 인간의 삶을 비유하는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나라야마 부시고’를 보는 듯하다.
호수 위에 뜬 암자 한 채, 암자와 뭍을 오가는 나룻배 한 척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공간 전부다. 등장인물도 노스님과 동승, 암자를 요양차 찾는 모녀, 그리고 경찰 두 명이 고작이다. 이미지는 무척이나 풍요롭다. 암자의 연못을 돌아다니는 비단 잉어를 비롯, 뱀, 개구리, 수탉, 강아지 등 산사의 온갖 축생이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나룻배 바닥에 그린 탱화와 암자 마당에 새긴 반야심경, 세월에 빛을 잃어가는 단청 등은 핀 다음엔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처연하게 드러낸다. 들끓는 욕망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안, 그리고 섹스와 죄 사이를 무한히 단진자 운동하는 슬픈 인간의 숙명이 읽힌다.
뱀과 개구리를 괴롭히며 크던 동승(봄)이 성(性)에 눈을 뜨고(여름), 정욕에 눈이 멀어 사람을 죽이고(가을), 자신의 삶을 뉘우치며(겨울), 자식을 기르는(봄) 인생의 사계엔 ‘김기덕다운’ 섬뜩함이 덜하다. 그러나 그가 줄곧 그려온 인간의 끔찍한 야성은 배경음처럼 반복된다.
노스님이 고양이 꼬리에 먹물을 적셔 반야심경을 적는 장면이나 스스로를 불태우는 다비식 등 퍼포먼스 아트에서나 볼 수 있는 충격적 장면이, 시적인 비약으로 벌어진 이야기의 틈을 메운다. 김 감독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15세 관람가. 19일 개봉.
/이종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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