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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닮은꼴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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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닮은꼴의 역설

입력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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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그리스 강변의 종려나무가 푸르름을 나풀거리던 어느 봄날…. 그들은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남부 바스라에서 진격해 올라간 지 불과 몇 주 만의 일이었다. 그들은 "이라크를 직접 통치할 의사는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바그다드 함락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법과 질서를 확보하는 일은 승전보다 훨씬 어려웠다. 서둘러 꼭두각시 임시정부를 내세웠건만 봉기와 소요는 그치지 않았다. 점령군은 영어를 썼다.

당시 사령관은 이렇게 강변했다. "우리 군은 정복자나 적군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해방군으로 왔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여러분에게 낯선 제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번영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난 봄 막강 미군의 얘기라고 생각하셨다면 착각이다. 20세기 초 중동으로 제국주의의 마수를 뻗치던 영국의 바그다드 침략이 21세기 이라크전과 얼마나 닮은꼴인지를 역사학자 니알 퍼거슨(뉴욕대 교수)이 정리한 내용이다. 1917년 3월 19일 현지 주민들에게 "해방군" 운운한 영국군 사령관은 F. S. 모드 장군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86년이 지난 2003년 봄.

역시 바그다드 함락을 코앞에 둔 4월 4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국민에게 공언했다. "이라크의 정부와 미래는 곧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잔혹한 정권을 끝장낼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평화적이고 대표성 있는 정부를 세우도록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 군은 떠날 것입니다."

미군 최고사령관이 영국군 사령관의 연설을 표절한 것인가?

한 세기 전 지금의 복사판 같은 중동사를 좀더 들여다 보면, 영국은 한동안 득의양양하다가 역풍에 휘말린다. 점령군에 대항하는 현지인들의 봉기가 잇따라 공군까지 동원해 진압해야 할 지경이 되는가 하면 수니파와 시아파 주민의 갈등은 내전 수준으로 증폭돼 갔다. 전리품이 골치덩어리가 된 것이다.

이라크전(3월 20∼4월 30일)에서 미군은 얼마나 죽었을까? 137명이다. 전쟁이 끝나고부터는? 15일 현재 173명이나 된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는 역설보다 더 심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부시 대통령의 얼굴이 부쩍 초췌해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만은 아니다.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면 아프가니스탄은 '부시의 베트남'으로 변한 지 오래다.

9·11 테러 2주년이 한 주도 채 지나지 않은 오늘 여러 의문이 떠오른다. 미국은 뉴 밀레니엄의 벽두를 두 번씩이나 피로 물들인 테러와의 전쟁에서 무엇을 얻었나? 사담 후세인은 죽었나?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는 찾아냈나? 오사마 빈 라덴은 잡았나? 알 카에다는 사라졌나? 미국은, 미국인들은 좀 더 안전해졌나?

정답은 한결같이 아니올시다다. 미국은 모든 외국인을 예비 테러리스트로 의심하며 공항에서, 대학에서 왕짜증을 부리고 있다. 거기에는 불안과 초조가 숨어 있다. 어떤 저널리스트는 이 모든 사태를 "범죄적 어리석음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했다.

병가(兵家)의 금언에 "훌륭한 장수는 무력을 뽐내지 않고,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남과 다투지 않는다" 했다. 현대 국제정치론으로 풀이하면 이쯤 되는 충고다. "힘을 바탕으로 일방주의에 의존하려는 유혹은 역설적으로 미국을 약하게 한다. 미국의 진정한 힘은 군사력(하드 파워)보다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대중문화에 기초한 소프트 파워에서 나와야 한다"(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장).

이 광 일 국제부 차장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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