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가 주는 로맨틱한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유학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그러나 환상을 갖는 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어느 곳이나 그렇겠지만, 프랑스야말로 냉정한 진단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곳이다.어려진 유학생들
파리는 최근 한국 유학생의 연령이 부쩍 낮아졌다. 종래의 유학생은 대학 졸업 후 문학이나 영화, 철학 등을 공부하는 이들이 주류였지만 요즘에는 '고졸 유학'이 많아졌다. 시내 16구 개선문 주변 어학원 중에는 50% 이상이 한국인인 곳도 있다. 파리 3대학 영화학과에 재학중인 김경희(28)씨는 "어학원에 다니는 한국 학생 대부분이 대입준비생"이라고 말한다. 조기유학도 많이 늘었다. 파리 근교에 부모와 같이 오거나 현지 후견인을 둔 한국인 조기유학생 200∼300명이 몰려 사는 정착촌이 생길 정도다. 이들이 프랑스를 택한 것은 영미권에 비해 학비가 싸고, 학교 입학이 쉽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학이 별도의 전형 없이 서류만으로 입학생을 뽑는데다, 외국 고교 졸업생에게는 대학입학 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면제해 준다.
그러나 일단 언어문제가 큰 장벽이다. 불어 비전공자의 경우 대개 1년 정도 어학원을 다닌 후 대학에 들어가지만 수년 동안 어학원만 전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부 대학에서는 다른 국가의 고교졸업자격을 인정하지 않아 바칼로레아 성적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프랑스에서도 '일단 바칼로레아만 붙어라'는 부모들의 잔소리가 입에 붙을 정도로 만만찮은 시험이라 비영어권 유학생들에게는 간단치 않다.
자유시간이 많은 교육체제상 특성 때문에 유혹에 취약한 것도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문제가 되고 있다. 이공계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한 유학생은 "PC방에서 밤새 게임하는 학생의 대부분이 한국 조기유학생"이라고 전한다. 상당수가 주재원이나 상사원 자녀인 이들은 프랑스 공립학교 대신 학비가 비싼 영어사립학교에 다니며 2년 이상 해외거주자를 대상으로 하는 국내 외국어고 특차입학을 겨냥하고 있다.
기술계 유학 '붐'
전통적으로 강세였던 인문사회계 유학생은 감소한 반면, 영화나 사진, 요리는 대폭 늘었다. 그러나 프랑스 교육체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경우가 상당수다.
최근 파리 3대학 영화학과에서 열린 입시설명회에는 고교생 자녀를 둔 한국 어머니들이 눈에 띄었다. 프랑스에서의 영화 유학을 마치 미국 할리우드에서 감독수업을 받는 것처럼 생각해서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대학은 철저하게 이론과 연구를 위주로 하고 요리, 패션, 사진 등 실용적인 기술은 '에꼴'이라 불리는 사립학교에서 가르친다. 당연히 접근법도 다르다. 파리 3대학 석사과정에 재학중인 영화학회 회장 차민철(31)씨는 "영화학도 메카폰을 잡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주로 기호학, 언어학, 사회학 등을 배운다"고 한다.
기술계 유학생들의 취업 실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상디칼, 에스모드 등 패션학교를 졸업하고 국내 의상실에 취업할 경우 월 평균급여가 20만∼40만원. '파리에서 패션을 전공했다'는 전문성이 처음에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유학생들은 1개월에 우리 돈으로 100만원 가량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유학생이 있는 반면, 300만원을 훨씬 넘는 돈을 쓰는 사람도 허다하다. 최근에는 명품쇼핑 때문에 거액의 빚을 진 유학생도 생겨났다. 별 생각 없이 프랑스 유학을 택했다 유행과 패션의 본산인 파리에서 결국 사치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파리로 몰려드는 한국 유학생들
전국 대학이 모두 '평준화'된 프랑스에서 한국 학생들은 유독 파리로 몰려 든다. 음악을 전공하는 한 대학원생은 "'파리유학'이 아닌 다른 지방에로의 유학은 한국에서 좀처럼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한국 유학생들은 엄청난 집세를 부담해야만 한다. 최근 다른 동양권 유학생들까지 파리에 몰려들면서 집세가 더욱 올라 한국 유학생들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외국인의 체류에 필요한 절차를 더욱 강화하는 등, 정책 흐름도 '개방'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때문에 1년에 한 번 하는 체류증 갱신이 유학생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사립에꼴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는 한 유학생은 "고객주의와는 거리가 먼 프랑스 공무원들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게 당연한 규범인 프랑스 사회에서 준비없는 유학은 스스로 고립을 초래한다. 파리 4대학 정치학과 박기라씨는 "불어 철자도 모르면서 파리에 오는 사람이 많다. 일거수일투족에 항상 다른 한국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유학생 입장에서는 자연히 이들을 기피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럽 정신문화의 본산이라는 점, 철학 등 학문의 근본적인 방법론을 배울 수 있다는 점 등 파리유학의 강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박씨는 "철저한 준비와 현지적응 노력이 있으면 영미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워갈 수 있다"고 말한다.
/파리=글·사진 양은경기자 key@hk.co.kr
■ 佛요리유학 윤화영씨
최근 국내에서 요리 등 프랑스 기술계 유학이 각광을 받고 있다. 대개 프랑스 요리유학 하면 우아한 케익 데코레이션과 근사한 푸드 스타일링을 떠올리지만 현실은 거리가 멀다. 공립 요리학교인 ESCP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재학중인 윤화영(28·사진)씨. 그는 최근 유학에 관심있는 이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는다. ESCP는 요리학교 중 유일하게 입학 시험이 있는 공립학교로, 윤씨는 사설 요리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를 졸업하고 지난해 이곳에 입학했다.
이곳에서는 음식을 '근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업을 목표로 실무적인 수업을 받는다. 가령 안심스테이크를 만드는 수업이라면, 먼저 레서피(조리법)를 짜고 재료값과 세금, 전기료 등 소요비용까지 계산해 채산성을 따지면서 음식을 만든다. 학교는 고객들의 평가 뿐만 아니라 보조원과의 호흡 등까지 감안해 학생을 평가한다. 때문에 요리 외에 법학, 경영학, 마케팅, 감각기관 연구 등의 과목까지 배운다.
실무는 3D의 연속이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드루엉이라는 파리의 유서깊은 식당에서 고기 파트의 두 번째 쉐프로 인턴 과정을 밟는 그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15시간이다. 늘 불을 곁에 두고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10㎏이 넘는 밀가루 부대를 날라야 한다.
주방의 규율은 군대처럼 엄격하다. 명령계통이 철저하지 않으면 자칫 사고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하루에도 수차례씩 듣는다"고 말한다. 빳빳한 흰 제복 또한 환상일 뿐이다. 주방에서 1시간만 일하다 보면 걸레로 써도 무방할 정도로 가름때가 끼고, 아무리 손톱을 짧게 깎아도 금방 더러워진다. 윤씨는 "인턴 과정에서 하루를 못 넘기고 그만두는 유학생들이 많다. 주방의 '현실'을 각오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고 말한다.
사진 전공으로 미국 뉴욕대에 합격했던 그가 요리유학을 결심한 것은 프랑스 공사로 재직했던 삼촌의 영향이 컸다. 그는 "프랑스 요리의 강점은 채소나 육류까지도 생산자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원재료의 충실함"이라며 "5∼6년 후 한국에서 내 이름을 건 정통 프랑스 레스토랑을 개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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