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 각료회의가 당초 핵심의제에서 벗어났던 싱가포르 이슈 때문에 합의에 실패하면서, 회의 결렬의 또다른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WTO가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결렬 이유는 싱가포르 이슈에 대한 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 연안 국가(ACP)의 강력한 반대. 한국과 일본이 싱가포르 이슈 4개 의제에 대한 일괄 협상을 주장하고, 유럽연합(EU)이 이슈의 절반만 협상하자고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ACP 국가들이 단 하나의 의제에 대해서도 협상할 수 없다고 맞서면서 회의가 결렬됐다는 게 WTO의 설명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싱가포르 이슈는 핑계일 뿐 회의 결렬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의제로 따지면 농업분야에서의 이견 때문이며, 협상주체로 따지면 중국·인도 등 개발도상국 진영의 협상력 강화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칸쿤 현지에 파견된 산자부 임채민(林采民) 국제협력투자심의관은 "회의 결렬은 본질적으로 농업분야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입장 차이에 기인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EU가 자신들에 불리한 농업분야의 수출보조금 철폐조항에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싱가포르 이슈에서 개도국에 일부 양보했으나, 상호 절충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회의 폐막을 앞두고 열린 비공식 회의에서는 싱가포르 이슈에 대한 합의가 실패, 농업분야에 대해서는 어떤 협의도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요컨대 농업분야 합의안에 만족하지 못한 선진국과 개도국이 싱가포르 이슈를 핑계로 회의를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개도국의 협상력이 UR 협상때보다 훨씬 강화된 것도 합의안 도출에 실패한 이유로 지목된다. UR 협상때만 하더라도 미국과 EU가 정하면 모든 것이 해결됐으나, 중국이 WTO에 가입한 뒤 개도국의 발언권이 크게 강화됐다. 한국 등 10개 농산물 수입국(G-10)을 제치고 농업수출 22개 개도국(G-22)이 농업부문 협상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단적인 예이다. 미국 무역대표부 졸릭 대표가 이례적으로 "개도국은 입장개진에 책임감을 져야 한다"고 불만을 터뜨린 것도, 개도국의 발언권 강화로 국제 무역협상의 구도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철환기자
'싱가포르 이슈'란
공산품과 농산품에 대한 무역장벽 제거를 넘어 자본이나 비즈니스 등의 국제적 이동까지 원활케 하려는 협의. 1996년 제1차 WTO 각료회의가 열린 싱가포르에서 논의가 시작됐다. 해외투자에 대한 국제적 보장장치(투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독점규제 규범(경쟁정책), 세관행정의 간소화(무역원활화), 정부조달시장의 투명성 확보 등 4가지가 의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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