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환경계획(UNEP)의 '글로벌500'상은 국내에서 내가 처음 받은 것은 아니다. 1989년 이 상이 처음 제정된 후 권숙표(權肅杓·전 연세대 교수)박사나 노융희(盧隆熙·서울대)교수 등 6명의 원로학자들이 수상했다. 또 최열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가 94년에 수상했기 때문에 환경운동 분야에서도 나는 실상 두번째였다.그러나 유기농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글로벌500'상을 수상하기는 세계적으로도 내가 처음이다. 이처럼 특이한 기록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재현(兪在賢) 전 경실련 사무총장 덕분이다. 유 전 총장은 92년 경실련의 경제정의연구소장을 맡은 이후 경실련 산하에 환경개발센터를 만들어 나를 초대 이사장으로 초빙해 줄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그러나 유 전 총장이 유기농운동의 성과를 들어 나를 '글로벌500'상 수상후보로 추천하기 위해 자료를 구하고 추천서를 작성하는 등 백방으로 애썼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UNEP의 '글로벌500'상 수상자 선정규정에 삼림보호나 반핵운동 등은 수상항목으로 올라있었지만 유기농운동은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유 전 총장은 각종 자료를 취합해 설득력 있는 추천서를 작성했고 UNEP본부도 이에 공감, 나를 수상자를 선정했던 것이다. 유 전 총장이 유기농에 대한 나의 20년 집착과 고생을 이해했고 이를 UNEP본부 관계자도 받아들였던 셈이다.
유기농법은 풀무원공동체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유기농법의 정착은 뜻밖의 곳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유기농을 실천하자는 뜻으로 '정농회'를 조직하고 전국을 돌며 무공해 농법을 설파하면서 나는 '간접살인'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자주 사용했다. 독극물인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는 것은 독약에다 밥을 비벼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에서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장 농민들이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농사는 어찌 지으란 말이냐"며 들고 일어났고 관변단체도 강하게 반발했다. 소란이 한창이던 80년, 방부제와 생장촉진 호르몬제를 뿌려 콩나물을 재배해 온 업자들이 무더기로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재판부는 놀랍게도 이들의 행위가 '간접살인'에 해당한다며 중형을 선고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농사는 '죽은 농사'라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94년 덴마크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발표된 자료도 나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유기농산물을 먹은 남성의 정자(精子)수는 1억 마리로 정상이었는데 농약과 화학비료로 키운 농산물을 먹은 사람은 절반인 5,000만마리 밖에 되지 않았다는 연구결과였다. 대표적인 환경서적 '도둑맞은 미래(stolen future, 테오 콜본 외 저)'에서는 미국의 일부 지역 독수리의 80%가 알을 부화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고 원인을 화학물질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유엔이 유기농운동을 배려해 준 것은 어쨌든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나중에 받은 상장을 자세히 읽어보고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유 전 총장이 그토록 고생하고 UNEP가 고심끝에 항목에도 없던 유기농부문에서 수상자를 확정했음에도 상장에는 '유기농'이라는 표현이 한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상장에는 "경실련 환경센터의 대표를 맡아 재활용, 오염방지, 대안에너지 등 '지속가능한 발전' 원칙에 근거한 운동을 벌여온 공로를 인정한다"는 간략한 내용밖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유엔에 이를 따질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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