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얽힌 일이면 무작정 미국을 지지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이들에게서 이성적 논리를 기대하는 것은 늘 헛되다. 이라크에 전투부대를 추가 파병하라는 요구에 선뜻 동조하는 논리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추가 파병이 북한 핵 문제와 연계돼 있어 거부하기 어렵다는 말은 무슨 소린지 난해하다.굳이 말뜻을 헤아리자면, 이라크에서 미국을 도와야 미국도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바라는 우리의 절실한 이해를 돌봐 줄 것이란 얘기로 들린다. 언뜻 그럴 듯하지만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면 북한을 공격해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들기라도 한다는 얘긴지 황당하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미국은 우리의 안전을 볼모로 북한 핵 게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친미 보수적 논리치고는 도무지 이상야릇한 것이다. 이런 역리(逆理)를 스스로 아는지, 파병 불가피론은 미국이 40년전 베트남전 때처럼 주한 미군 감축 또는 철수를 추가 파병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설을 새로 들고 나온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이 미군이 철수한다면 앞뒤 가릴 여유 없이 불안해 할 것이란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조짐은 없는 점에 비춰 길게 논란할 게 못 된다. 미국이 이라크 때문에 한국 주둔을 포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이 이라크 상황과 관계없이 추진하는 주한 미군 재배치를 추가 파병과 연결짓는 것도 어색하다. 재배치에 따른 미군 일부 감축을 막겠다고 더 큰 규모의 해외 파병을 감행하는 것이 안보 역량 유지책인지 의문이다.
결국 군더더기 논리를 배제하고 나면 '한미 동맹'을 지키는 것, 바꿔 말해 미국을 따르는 것이 국익에 도움된다는 구태의연한 명분이 남을 뿐이다. 전후복구 참여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 따위는 유치하다. 문제는 40년 전처럼 미국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국익'에 정말 도움될 것인가를 제대로 헤아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뒤늦게 인식했지만, 베트남전 때도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전쟁 명분을 확보하려 했지만,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논리에 적극 동조한 것은 필리핀 태국 한국 등 몇몇 나라 뿐이었다. 미국이 우방을 전쟁에 끌어 들인 주된 목적은 바로 그 취약한 명분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쟁은 결국 미국 사회의 양심조차 피폐하게 만든 부도덕한 전쟁으로 기록됐다. 베트남인 수백만 명을 살상한 추악한 전쟁에 적극 가담한 것은 참전 장병 33만 명의 애국적 헌신과는 별개로 부끄러운 과거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의 여건과 의식은 전쟁의 도덕성을 따질 형편이 되지 못했다. 군사·경제적으로 우세한 북한의 위협이 실재했고, 미국의 지원에 목을 매단 처지에서 파병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 절박한 선택으로 우리는 군현대화 등 안보역량을 크게 강화했다. 특히 첫 전투부대를 파병한 1965년 수출액이 2억 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 참전 장병들은 한해 수천만 달러씩 피에 젖은 달러를 고국에 보내 경제적 도약에 기여했다. 1970년 참전 외국군 지원을 다룬 미 상원 청문회는 그때까지 한국군에 지원한 돈을 10억 달러 규모로 집계하면서, "귀국 한국군이 가장 탐내는 물품은 TV세트와 전투식량 C레이션, 미제 화장지 등이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이라크에 다국적군을 끌어 들이려는 주된 목적도 이라크 점령 통치의 명분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테러 척결이나 대량살상무기 위협제거 등의 명분은 석유를 노린 제국주의적 침략의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제 사회는 이미 확인했다. 이런 마당에 다시 국익을 좇는다며 미국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은 베트남 참전보다 훨씬 부도덕한 선택이 될 것이다. 안정적 석유공급 확보 따위를 속삭이는 것은 'C레이션과 미제 화장지'의 치욕을 되풀이 감수하자는 것과 다름없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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