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실종된 1970, 8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과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의 한국 언론은 일제 치하 이후 제2의 암흑기에 빠졌다. 이런 시기에 민주주의를 열망한 한국의 저항 지식인과 학생들은 일본에서 전해 오는 한 칼럼을 통해 민주화의 불씨를 살릴 수 있었다. 민주주의에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는 청량제 같은 이 칼럼은 일본의 진보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연재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30여년간 얼굴없는 칼럼니스트 'T.K.생'으로만 알려졌던 칼럼의 저자는 마침내 올 8월 이 월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지명관(79) 한림대 석좌교수다.그러나 지 교수가 한 일본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세카이 편집장과 지 교수의 인연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상계' 편집장이었던 지 교수는 장준하씨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일본의 한 보수 잡지에 이들이 한일 수교에 매우 우호적이라는 오보가 나오는 바람에 야스에씨는 지 교수를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지식인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로부터 6년이 흘러, 덕성여대에 재직하던 지 교수는 도쿄(東京)대에서 '한국의 지식인'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한 언론인의 소개로 알고 지내던 야스에 세카이 편집장을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다.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바 있는 지 교수는 야스에씨와 오해도 풀 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야스에씨로부터 칼럼을 부탁받게 된다.
지 교수가 세카이에 처음 게재한 칼럼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과 한국'이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김순일'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이 칼럼으로 지 교수의 필력은 물론 진보적 사상을 확인한 야스에씨는 한국의 실상에 대한 칼럼을 또 부탁한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야스에씨는 당초 이 칼럼을 한시적으로 게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73년 8월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해 한국과 일본이 발칵 뒤집혀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김대중씨와 친분이 있는 이들 둘은 결국 매달 칼럼을 게재키로 의기투합했다. 국내외 민주인사를 통해 얻은 자료를 근거로 독재 정권을 고발하는 지 교수의 펜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칼럼이 계속되자 한국 정보기관은 칼럼 필자가 한국인이라는 확신을 갖고 추적에 나섰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원고 전달과정은 '007 작전'을 방불했다. 이른 새벽 공원에서 전달하기도 하고, 야스에씨의 비서가 늦은 밤 지 교수의 연구실을 몰래 찾아가기도 했다. 야스에씨는 또 지 교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모든 원고를 자신이 옮겨 적은 뒤 원본은 파기했다. 세카이 내에서도 칼럼니스트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비밀에 부쳐졌다.
지 교수는 87년 '6·29 선언'으로 한국에 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판단해 88년 귀국한다. 95년에는 야스에씨를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주최한 '해방 50년과 패전 50년'이라는 학술대회에 초청하기도 했다. 둘은 한일 우호관계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양국 지식인들의 역할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계속했다.
그러던 96년 야스에씨가 강연도중 쓰러졌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곧바로 일본으로 달려간 지 교수는 의식불명의 야스에씨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97년 겨울이었죠.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전해 주자 야스에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군요. 야스에씨는 2년 여의 투병 끝에 결국 98년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지 교수는 "야스에씨는 겸손하면서도 비판정신이 투철한 진정한 언론인이었다"고 회고하면서 "그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적이었다"고 말했다.
/송두영기자 dy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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