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잔혹하고 또 집요했다. 12일 밤 내습한 14호 태풍 '매미'에 한가위 연휴 고향의 밤은 치떨리는 악몽이었고, 주민들은 전기도 전화도 끊긴 불안·불면의 밤을 지새야 했다. 13일 둘러 본 바람 맞고 물 담은 도시와 마을들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영·호남 강원·제주의 이재민들은 악몽보다 더 처절한 현실 앞에 통곡하고 있었다.
마산 간밤의 태풍·해일로 최소 10여 명이 지하층에 수몰된 것으로 알려진 마산시 해운동 해운프라자(일명 롯데리아) 상가 앞. 새벽부터 상가 앞에서 실종된 가족·친지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밤 늦게까지 수색작업을 지켜봤다.
오후 9시께. 해군 수중폭파대(UDT) 대원들이 지하2층에서 노래방 아르바이트생인 문모(20)씨와 노래방 손님 서모(23·여)씨의 시신 2구를 인양하자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선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삼엄한 경비 속에 온 종일 계속된 물빼기 작업은 이날 밤 늦게까지 지하에 들어 찬 물(약 9,000톤)의 절반 가량을 빼내는 데 그쳐 실종자 가족들을 안타깝게 했다.
지하3층 지상6층의 건물 지하1층은 주차장. 피해자는 주로 지하2층과 3층의 로바다야끼 주점 및 노래방 손님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들은 물이 갑자기 덮쳐 순식간에 차 오른 만큼 피해자가 20여 명에 이를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건물 침수는 만조 때인 12일 오후 10시께 바닷물이 역류하면서 순식간에 진행됐다. 또 600m 전방 마산항 서항부두에 야적됐던 수입 원목 300여 개가 물에 휩쓸려 와 건물 지하층 입구를 막는 바람에 피해가 증폭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직전 건물에서 빠져 나왔다는 최모(24)씨는 "당시 지하2층에만 20여 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하2층 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조카(21·여·대학2)를 찾아 나선 정모(54·여)씨는 "마산시는 양수기 하나 제때 구하지 못하고 있다"며 당국의 느림보 수색작업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소방 관계자는 "지하3층까지 배수를 끝내려면 일러야 14일 새벽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피해가 컸던 남성·해운동 일대 옛 마산항 매립지역과 어시장 등지 역시 건물들이 뼈대만 간신히 남긴 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폐허로 변했고, 졸지에 생계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망연자실한 채 복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산= 이동렬기자 dylee@hk.co.kr
부산
13일 오전 부산 영도구 남항 선착장. 전날 순간 최대풍속 40m의 강풍에 닻줄이 끊긴 선박 15척이 영도대교의 상판에 걸려 있었다. 곁에 섰던 한 선주는 "저 배가 전 재산인데…, 저걸 끌어내야 하는데…"하며 말을 잇지 못했고, 그 사이에도 뒤엉킨 배들은 빠른 물살에 몸을 맞긴 채 영도대교의 교각을 밀어대고 있었다.
시내 전역 육교에 걸려있던 플래카드는 갈기갈기 찢겨 넝마로 변했고, 상가 간판들은 낙엽처럼 뜯긴 채 황량한 도시의 골목에 나뒹굴고 있었다.
3시간여 동안 지속된 태풍의 강습 앞에 부산은 무기력했다. 영도구 남항동 방파제 일대 500여 세대 가옥이 만조의 바닷물에 침수됐고, 해운대구 신시가지 아파트 일대 수십 여 가구의 유리창도 강풍에 파손된 채 흉물처럼 방치돼 있었다.
남부민 1동 최모(44)씨는 "사전에 대비를 한다고 했는데 역부족이었다"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눈 앞에 캄캄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전기가 들어와 태풍속보라도 알 수 있는 곳은 그나마 나은 편. 가로수와 전신주가 뿌리째 뽑히거나 전깃줄이 끊기는 등 피해로 정전된 가구만도 33만 가구에 달했고, 이 가운데 13만 가구 50여만 명의 시민들은 밤새 불안에 떨어야 했다. 특히 해안에 가까운 지역 송전선로는 소금기로 복구에 곤란을 겪어 이날 오후까지 단속적인 정전사태에 시달려야 했다.
상수도 공급도 곤란을 겪고 있다. 고지대 송수 가압장 상당수가 복구되지 않아 중구 영주동일대 주민들은 아침밥을 거르거나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서 밥을 지었고, 수영구 남천동 일대 상당수 아파트 주민들도 이날 오전까지 식수난에 시달려야 했다.
교통상황도 정상화하려면 최소 하루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할 전망. 전날 타워크레인이 전복되면서 소방관 부상 등 인명피해를 냈던 수영구 남천동 일대는 도로 정비가 끝나지 않아 극심한 체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산=김종한기자 tellme@hk.co.kr
삼척
지난해 광동댐 범람위기로 전 주민이 대피했던 강원 삼척시 하장면 광동댐 아래 광동리 주민들은 이번 태풍에도 똑 같은 피해를 겪자 치를 떨었다.
산사태로 쓸려 내려온 흙과 모래로 뻘밭이 돼버린 광동리 시가지와 우회도로(38국도)에는 나뭇가지 돌덩어리 쓰레기 등이 널려 있었다. 이번 태풍으로 70여 가구 중 20여 채의 가옥이 침수됐으며, 침수된 가옥에는 돌덩어리 흙더미 나무등걸이 밀려들어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취수장이 유실돼 단수되면서 주민들은 먹을 물과 화장실 용수가 없어 애를 먹는 것은 물론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간밤 주민들은 고지대로 긴급 대피해 마을을 삼킬 듯 굉음을 울려대는 골지천을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했다. 지난해 폭풍 때 제방이 터지며 범람했던 마을 옆 골지천은 이번에도 범람해 인근 농경지 30여 ha가 유실, 침수됐다. 새로 건설한 석축 옹벽 돌망태 등이 힘 한번 못써보고 여기저기서 쓸려내려 갔다. 이장 최상열(47)씨는 "그 동안 계속된 비로 농작물의 피해가 컸는데 유실, 침수로 그나마 수확을 못하게 됐다"고 한숨지었다.
하장면과 외부를 잇는 35번 국도, 424번 지방도는 산사태와 유실로 끊긴 상태. 중봉리 30여 가구는 지난해 수해로 유실된 교량이 미복구돼 가교로 통행했었으나 이번 태풍으로 3개 가교가 모두 유실됐다. 중봉·역둔·장전리 등 260여 가구의 경우 취수장과 관로유실, 정전 등으로 상수도가 공급되지 않고 있다.
/삼척=곽영승기자 yskwa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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