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역사가 단지 뒤늦게 비교될 뿐 아니라/ 우리는 어제의 오늘을 보게 된다/ 내일의 오늘이 아니다'(김정환, '편안하게 길을 잃다―아침'에서) '바람은 불운한 자들의 어깨 위에 여전히 차다―/ 젊은이도 노인도 관음보살을 알고 있으나,/ 인생의 부당한 사건은 그치질 않는다.'(휴틴, '12행'에서)시인 김정환(49)씨는 새천년 첫해 벽두에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 작가회의가 추진한 한국―베트남 문학 교류 행사였다. 장마 냄새 찌든 지하 생맥주집, 삶은 계란 구멍가게, 노래방의 낡은 네온사인, 막 자리잡기 시작한 키 낮은 살림집…. 하노이의 뒷골목은 경제개발로 들떴던 1970년대 서울을 떠올리게 했다. 평양 같기도 했다.
박정희가 없고 김일성이 없을 뿐이었다. 김씨는 그때부터 시를 썼다. '하노이―서울 시편'(문학동네 발행) 연작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국의 시인에게는 전쟁 공습의 기억이 없다. '6·25/ 사진이 있고 역사가 있지만/ 너무 참혹해서/ 일상이 되지 못했다' 하노이에도 공습의 기억이 없다. '사진이 있고 역사가 있고 기념관도 있지만…그보다는/ 삶과 가난이 더 가까운 까닭이다' ('공습과 기억'에서) 마중나온 베트남 작가의 환한 웃음에서 '혁명의 열기'를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동지'들은 '혁명의 열기가 주책으로 되어버린/ 남한의 시대도 증거했다'('3중주'에서) 하노이에서 서울에 있는 듯 익숙했던 것이, 이제 서울에서 하노이에 있는 듯 익숙하다. 연작 23편을 묶은 시집은 영문판과 함께 출간돼 베트남에 보내진다. 한국―베트남 문학 교류의 첫 결실이다.
또 하나의 결실은 베트남 시인 휴틴(61)의 시집 '겨울편지'(문학동네 발행)의 국내 출간이다. 김정환씨는 베트남 작가들과 나눈 우정을 잊지 않았으며, 영어로 쓰인 휴틴의 시를 번역하는 작업을 기꺼이 맡았다. "어렵고 놀라운 시는 없다. 베트남 농촌의 서정과 전쟁의 상처는 우리에게도 낯익다. 놀라운 것은 서정과 전쟁의 일상이 서로 왜곡하기는커녕 공존을 넘어 상호 '절대 명징'화하는 것"이라고 김정환씨는 휴틴의 시를 평한다. 가령 이런 대목이 그렇다. '깊은 밤 빛나는 별들이/ 바다 쪽으로 흔적을 자르고,/ 군인들은 그 해 겨울 그 별빛으로 언덕을 더듬고,'('판티에트에서')
휴틴은 "일단 시가 쓰여지면 그것은 더 이상 시인의 것이 아니다. 내 시는 내 영혼이 깃든 내면의 집이다. 한국의 독자들이 이 집을 방문하면, 그 안에서 편안히 거닐면서 소박한 세간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베트남전쟁 참전국인 한국은 베트남에게 '가해자'일 것이다. 2002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휴틴은 이 질문에 대해 "베트남 인민들의 삶의 방식은 '과거를 닫아버린다'는 것과 '미래를 지향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의 시는 그의 말에 대한 실천이다. '네게 쓴 편지는 잉크가 얼룩졌었다./ 하지만 대나무 벽은 얇다, 그리고 안개가 계속 새지./ 이 추운 산 위에선,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아침이면, 갈대 줄기쯤이야 사라질 수 있다.'('겨울 편지'에서)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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