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알고 있다. 널 미치도록 잡고 싶다."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담당형사 박두만(송강호 분)은 경찰을 그만두고 녹즙기 장사를 하다 우연히 들른 사건 현장에서 "범인을 봤다"는 한 소녀의 증언을 듣는다. 영화는 박두만의 간절하고 처절한 눈빛을 클로즈업하면서 마무리된다.
영화 속 박두만처럼 사건을 실제로 수사했던 형사가 8일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생각의나무 발행)는 자전에세이를 냈다. 박두만과 달리 아직 현역 경찰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경기경찰청 형사과 강력계장 하승균(57) 경정.
"혈액형 B형, 키 168∼170㎝, 몸무게 65㎏, 왼쪽 손목 흑점, 검지에 흉터가 있는 오뚝한 코와 날카로운 눈매의 현재 나이 42∼45세…"
그가 기억하는 범인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담당하지 않은 사건이라도 용의자가 이런 신체적 특징을 보이면 직접 찾아가 만나고 화성 사건에 대입시킨다. 그에게 화성사건은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담당 형사다'라는 부제가 붙은 에세이는 화성사건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자 범인을 잡지 못한 고해, 범인을 잡겠다는 다짐이다. 그가 끔찍한 피해자 시신 사진과 사건 현장 약도, 사건 현황, 범행 수법 등을 두툼한 앨범 3권에 담아 보배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도 같은 뜻에서다. "앨범은 범인에 대한 종합 자료집이자 왜 잡지 못했는지 돌아보게 하는 기록입니다."
하 경정은 "소설, 영화로 사건이 많이 부풀려지고 뒤틀어졌다"며 "2년 7개월 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진범을 잡기 위해 범인에 대한 정보를 널리 알리자는 목적에서 앨범 기록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고 말했다. 책은 '아직 추적은 끝나지 않았다'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악마의 출현(1차 사건)' '깨어진 신혼의 꿈(3차)' '악마의 초상화(7차)' '마지막 희생자(9차 사건)' 등 13장으로 구성돼 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1986년 9월 15일∼91년 4월 3일 경기 화성 일대에서 부녀자 10명이 연쇄적으로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사건으로 진범이 밝혀지지 않은 '세계 100대 살인사건'의 하나다. 최근 '살인의 추억'으로 영화화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하 경정이 이 사건과 연을 맺은 것은 1986년 12월 3차 사건 때부터. 6개 수사팀 중 하나를 맡아 10건 중 7건을 담당했고 4건은 직접 시신을 수습했다.
윤곽조차 잡히지 않는 범인 때문에 해프닝도, 시련도 많았다. "무당에게 애걸도 하고 여경을 야산에 투입, 범인을 유인하기도 했죠. 당시엔 형사 특유의 육감도 통하지 않더라구요."
동료들이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88년엔 무리한 수사를 하다 용의자를 숨지게 해 담당형사 3명이 구속되고 자신도 직위해제됐다. "몇 달씩 집에 못 가고 밤낮 고생하다 7차 수사 때 과로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동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71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한 뒤 30년 넘게 강력계 형사의 길만 걸어 온 하 경정은 '광주 여대생 공기총 피살사건' '포천 농협 총기강도 사건' 등을 해결해 사건통으로 알려져 있다.
"범인을 잡지 못한 형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열네살 여중생이 살해됐을 땐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살해 현장에서 범인을 저주하고 '너를 반드시 잡고 말겠다'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반드시 잡습니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사건 현장이 담긴 지도 위에 꽂혔다.
/글·사진=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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