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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폭투를 만들어내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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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폭투를 만들어내는 조건

입력
2003.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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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메이저리그로 불리는 미 프로야구에 대한 미국사람들의 사랑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매년 10월 말을 전후로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 우승팀 간에 벌어지는 최종 결승전을 '월드시리즈'라고 일컫는 대목에서는 오만함 마저 드러난다. 우리 정서로는 'US 시리즈'나 '북(北)아메리칸 시리즈' 정도가 적확한 표현일 것 같지만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처럼 총애를 받고 있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수준 이하의 플레이가 종종 목격되곤한다.2000년 10월 있었던 일이다. 전력에서 다소 앞선 애틀랜타와 세인트루이스가 지구 결승(디비젼 시리즈)에서 맞붙었지만 애틀랜타의 승리를 점치는 팬은 거의 없었다. 세인트루이스의 최고 유망주로 촉망받던 릭 엔키엘이란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 강속구를 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기대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3회 들어 엔키엘이 폭투를 5개나 범하면서 4실점한 후 마운드를 내려갔고, 팀은 대패했다. 세인트루이스는 천신만고 끝에 지구 결승시리즈에서 애틀란타를 제치고 월드시리즈 전 단계인 리그결승(챔피언쉽 시리즈)에 올라갔지만 엔키엘 때문에 또 낭패를 보고 만다. 시리즈 2차전에서 권토중래를 노리며 마운드에 선 엔키엘은 역시 폭투 2개를 던지고 강판당했다. 결국 세인트루이스는 시리즈에서 패했고, 그 투수는 아직도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호된 시련을 겪고 있다. 폭투가 투수와 팀을 망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이 케이스는 미 프로야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기록돼 있다.

엔키엘은 왜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투구를 했을까. 투수와 포수간의 '약속 메커니즘'을 떠 올리면 당시의 상황을 어림짐작할 수는 있다. 투수는 철저하게 포수와의 약속에 따라 공을 던지도록 돼 있다. 둘간의 사인으로 약속은 전달된다. 시속 150㎞를 넘나드는 빠른 공이 약속을 잊고 제멋대로 날아들면 포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컨디션 난조가 폭투의 원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투수의 나대로식 '애드 립(ad lib)'이 폭투를 유발하곤 한다.

폭투는 야구의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사람들이 던지는 '언어의 폭투'는 더 무섭다.

대통령의 거친 입이 잠잠해지는 가 했더니 이젠 바톤을 이어받듯 정치권 곳곳에서 막말이 튀어나온다. 대통령이란 호칭을 생략한 '이름만 부르기'가 난무하고 공식석상에서 벌어지는 욕설 주고받기는 일상사가 됐다. 갱 영화의 너저분한 대화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다. 영화는 재미라도 있지만 세금으로 월급받는 사람들의 언어의 폭투는 "혈세가 욕으로 돌아왔다"는 분노만을 일게 한다.

야구의 폭투는 경기를 망친다. 게임의 긴장도와 수준을 확 떨어뜨려 팬들을 떠나게 한다. 말의 폭투가 가져오는 부작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언어의 폭투에 대한 벌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폭투를 연발한 투수는 강판당하고 연봉까지 깎이는 수모를 당하게 되지만, 말의 폭투에는 간혹 같은 부류 사람들의 소리없는 박수까지 뒤따르곤 한다.

거친 입의 주인공들이 미리 폭투를 준비하고 입을 벌렸다고는 믿고 싶지는 않다. 다만 상황에 맞는 애드 립을 할 만한 자질이 없으면서도 거친 입을 여는 인사들이 많아 보인다. 빼어난 음악 연주자의 애드 립에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낸다. 기본과 실력을 못 갖춘 연주자의 애드 립은 소음이자 폭력이다. 그런 연주자는 대본에 따라서만 입과 손을 놀리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무대를 떠나는 것이 만인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김 동 영 체육부장 dy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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