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7> 미술관 건립②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7> 미술관 건립②

입력
2003.09.09 00:00
0 0

나는 미술관 건물을 착공할 때 정부에 은근히 기대를 했다. 당시 정부에는 미술 문화 진흥기금이 500억원이나 책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1997년 대선 직전에 김대중 대통령후보는 재임 중에 300개의 미술관을 짓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 300개는커녕 단 하나의 미술관도 만들지 못했다. 막상 내가 문화관광부 예술진흥국에 찾아갔을 때, 담당자는 그 자금을 순수미술에는 지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나는 "순수미술에 쓰는 것이 아니고 21세기 문화경쟁 시대에 맞는 문화산업의 기본인 미술관을 짓는 것이다. 대통령도 미술관을 300개나 짓는다고 큰소리 쳐놓고, 작가가 자비를 들여 미술관을 짓는데 왜 도와주지 못하느냐"고 항의를 하였다. 그리고 나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당시 문화부 장관이던 박지원씨를 찾아갔다. 박 장관은 그 자금을 사용하는데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오지철 문화정책 국장에게 당장 서둘러서 도와주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오 국장은 무슨 이유인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박 장관을 다시 찾아갔더니 "안되면 안 된다고 미리 말씀을 드려야지 왜 노인이 다시 오게 만드느냐"고 내 앞에서 호통을 쳤다.

이러한 모습을 본 수는 장관실에서 나오자 마자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더니 끝내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스스로 비참한 생각이 들어 그 길로 돌아와버렸다. 그 후 나는 빚을 얻어 건축비를 마련하기로 했다. 당시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미술관 건축을 수에게 모두 맡긴 상태였다. 그 이후 수의 고통스러운 나날은 미술관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됐다.

어쨌든 2000년 1월 미술관 공사를 위해 첫 삽을 떴다. 갑자기 시작한 공사라 그런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터졌다. 그 중에서도 엘리베이터 설치를 위해 만든 옥탑문제로 애를 먹었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하므로 엘리베이터를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일부 주민들이 조망권을 내세워 민원을 제기했던 것이다. 구청에서는 법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옥탑을 철거해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나는 이 문제로 건설부와 서울시청에 유권해석을 문의했는데 모두 괜찮다고 해서 그 두 군데에다 민원을 제출하였고 그 외 여러 곳에 탄원서 겸 민원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 민원이라는 것은 허울만 좋은 개살구였다. 여러 상황에 맞게 처리와 답변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 서류는 다시 구청 담당부서로 되돌려 보냈다. 이런 민원처리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옥신각신하다가 1년이 가까워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옥탑을 헐어버려야 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문화행정과 정책이 미술관 용도의 건물과 노약자, 장애인 시설에 인센티브가 전무한 현실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또 개인 미술관 설립과 운영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미술관법을 보면서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나는 이때 나의 조국을 떠나고 싶었다. 나와 한일문화교류 2인전을 했던 일본인 히라야마 이쿠오 화백의 경우 그의 고향이 시코쿠 근처의 자그마한 섬이었는데 주민들은 자기들의 자랑이라며 미술관을 지어주었고, 또한 정부는 국비를 들여 시코쿠로 통하는 다리까지 놓아준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인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4월에 미술관이 개관했다. 그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개관식에는 김종필 총재를 비롯하여 장명수 한국일보 사장, 조경희 전 장관,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많은 귀빈과 화단의 친구들이 참석해 축하를 해주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문화관광부에서는 장·차관을 비롯해 실무자에게까지 초청장을 보냈으나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술관은 지하 2층, 지상 2층으로 지었다. 지하 2층은 내 작품을 보관하면서 전시하는 공간이고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영재교육미술관을 겸하여 어린이들에게 미술지도를 하고 있다. 지상 2층은 초대작가를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건물을 짓는 도중에 강화된 주차장법에 따라 주차장이 모자란다고 지하 1층 전시장을 주차장으로 바꾸라는 연락이 왔다. 문화대국 프랑스의 피카소, 샤갈, 마티스 미술관 내에 주차장 시설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내 미술관은 자리를 잡았다. 미술관에 대해 민원을 제기했던 일부 주민들에게 품었던 섭섭한 감정도 사라졌다. 어차피 한 동네 사람이 됐는데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건축공사를 할 때에도 도움을 줬던 분들에게도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앞으로는 내 미술관이 모든 미술인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문화선진국 미술관처럼 문화의 향유와 재충전을 주는 장소로 발전하고, 어린이들이 이 미술관을 통해 자라고 자라서 세계 미술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길 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