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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99>梁世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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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99>梁世奉

입력
2003.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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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9월8일 독립운동가 양세봉이 만주(滿洲) 지린성(吉林省) 퉁화현(通化縣) 터우다오거우(頭道溝)에서 순국했다. 향년 38세.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사의 우뚝한 봉우리였던 양세봉은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친일 반역자 무리의 꾐에 빠져 매복 일본군과 친일 분자들에게 사살됐다. 그는 "조선 독립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몸을 잘못 놀려 개죽음을 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이라는 말을 남겼다.양세봉은 평북 철산 출신이다. 호는 벽해(碧海). 그는 1919년 3·1운동 직후 항일 무장운동 단체인 천마산대(天摩山隊)에 가입한 이래 길지 않은 생애를 민족해방운동의 견결한 전사로 살았다. 양세봉이 치러낸 수많은 전투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은 1932년 3월의 영릉가성(永陵街城) 전투다. 그 즈음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통해서 괴뢰 국가 만주국을 출범시킨 직후였는데,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양세봉은 휘하 3개 중대를 이끌고 중국 의용군과 함께 만주 영릉가성을 공격해 일-만 연합군을 패퇴시켰다. 그것은 일본측으로서는 만주 점령 이후에도 항일 게릴라전이 계속되리라는 불길한 징조였다. 실제로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조선혁명군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일제가 괴뢰 국가를 통해 만주를 거의 완전히 장악한 1930년대에도 10년 가까이 싸움을 계속 했다는 데 있다.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처럼 널리 알려진 항일 게릴라전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손길이 덜 촘촘했던 1920년대 초에 벌어졌다.

퉁화현의 조선인들은 양세봉의 시신을 수습해 마을 뒷산에 묻었으나, 일본 영사관 소속 군경들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잘라낸 목을 담장에 걸어놓았다고 전한다. 이 끔찍한 에피소드가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런 전언 자체가 양세봉에 대한 일본군측의 증오와 두려움을 알려준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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