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소지는 있을 것이나, 평소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되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집단주의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그게 뒤바뀐 감이 없지 않다. 삶은 집단주의적으로 살면서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개인주의적으로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이는 아무래도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가 낳은 산물이 아닌가 싶다. 한 세대 이상이나 지속된 식민 통치의 경험과 동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또 한 세대의 기간에 걸친 강압적인 권위주의 통치 체제가 그런 결과를 낳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20세기는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없는 세월의 연속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선 집단주의적 가치에 충실해야 했겠지만, 자신과 가족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개인 플레이'를 하거나 개인적인 연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혈연, 지연, 학연 등 연고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정부나 공적 영역보다는 여전히 연고망에 대한 신뢰도가 훨씬 더 높은 걸 어찌하랴.
전쟁 상황에서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익히고 전수된, 믿을 건 오직 나와 가족 밖에 없다는 신념과 행동양식은 한국인의 강인한 생존력과 개척정신을 키워준 동력으로 작용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절에도 계속되는 그런 삶의 방식이 필요 이상으로 삶을 격렬하고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의식과 행태에 있어서 만큼은 아직도 6·25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대학입시 전쟁'은 사회적 문제의 개인주의적 해결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독특한 습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일 것이다. 10대 후반에 치르는 딱 한번의 경쟁으로 평생의 경쟁력을 결정케 하는 기존 시스템은 그 시점에서 경쟁의 과부하, 또는 병목 현상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 살인적인 경쟁의 강도를 낮추고 경쟁 기간을 전 생애에 걸쳐 분산시킴으로써 '경쟁 및 보상의 합리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실천적 대안은 이른바 '대학별 특성화'를 통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수의 명문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안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다. 반대 이유는 크게 보아 두가지다. 하나는 그게 근본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대안은 있을 수 없는데도 그걸 반론이랍시고 해대는 걸 보면 그 숨은 속뜻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는 그게 '포퓰리즘'(민중주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우리의 풍토가 문제일 것이다. 그 풍토라는 게 바로 우리의 '전시체제 체질'이다.
최근 현대홈쇼핑에서 캐나다 이민 상품이 983명의 구매자로부터 175억원 어치나 팔려나갔다. 구매자들 가운데엔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전시체제 체질'에 대한 피곤함에 지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캐나다에 가서 성공하기 위해선 '전시체제 체질'이 축복이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라 전체로 볼 때에 우리의 '전시체제 체질'은 이제 더 이상 강점이 아니다.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경쟁이 과거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엔 기여했을 망정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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