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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6> 미술관 건립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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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6> 미술관 건립①

입력
2003.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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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던 그림을 걸어 놓고 한참 들여다보면서 불만스럽거나 고쳐야 할 데를 찾아 다시 그리곤 한다. 작품이란 작가의 생명이 아닌가. 바로 하나의 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화면 속에서 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국내외 언론 매체에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르로 평가받은 하모니즘으로 20세기 후반 미술사에 한 점을 찍었으며 21세기로 가는 토대를 굳건히 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이 작품들을 어떻게 보관하느냐였다. 그 동안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작품들만은 귀중하게 지켜 왔다. 그래서 결국 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1999년 어느 날 수가 개인미술관을 만들자는 얘기를 꺼냈다. 수는 2년 후부터는 삼재(三災)가 들기 때문에 지금 미술관을 짓지 않으면 생전에 미술관을 지을 기회가 없다며 셋방살이를 하더라도 시작하자고 서둘렀다. 나는 그림을 팔지않고 아껴 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중에 미술관을 지을 만한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더욱이 99년 누드 드로잉전을 열면서 건강이 급속히 악화했다. 전시 준비를 위해 두 달여 동안 매달렸더니 전시가 끝난 후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젊은 시절 버릇대로 밤샘 작업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술관을 지을 돈이 없으니 우선 빚을 얻어서라도 땅을 구입하고, 그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건축비를 충당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비교적 땅값이 비싸지 않고 미술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 평창동 쪽으로 부지를 물색하다가 북악파크 호텔 뒤에 있는 땅을 샀다. 처음에는 400평이 나왔는데 돈이 여의치 않아 220평만 샀다.

미술관 건축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조상의 덕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조상을 모시는 일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돈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어쨌든 조상이 남겨준 땅 덕분에 그나마 도움을 받은 게 다행스럽다. 현재 무학여고 뒷편 500여 평이 우리 땅이었고 그곳에 할아버지 산소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 산소를 이장한다고 해서 따라간 적이 있다. 그날 풍수지리를 보는 지관이 같이 가다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아버지에게 "이 땅은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면 좋은 자리"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영문을 모르고 듣기만 했으나 아버지는 그 말을 믿었던지 그 땅을 내 명의로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 함흥에 있었고, 광복이 되고 서울에 와서도 그 땅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도 동생은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면서 그 땅을 봐왔기 때문에 나에게 나무라도 심어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했지만 그럴 만한 경제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1949년 동화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할 때 당시 한국은행 간부로 계시던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 등 선린상고 졸업생들이 적극 후원해 주어 상당한 돈을 모았다. 땅을 그때 정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오로지 돈을 모아 프랑스 유학을 가겠다는 마음뿐이어서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나는 조부 산소를 방치하다시피 했고 난리통에 내려온 피란민들이 이 곳에 자리잡으면서 일대는 쓰레기 더미로 뒤덮였다. 그리고 내가 프랑스에 가 있는 동안 전처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그 땅을 팔고, 조부 유해는 화장해 버린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어 그냥 두었다. 그런데 얼마 후 세무서에서 재산세 납부고지서가 날아 왔는데 그 곳에 있는 땅 일부에 대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 신고를 하고 남은 사이사이의 자투리 땅 60여 평이 아직 내 이름으로 돼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그 땅을 사겠다는 사람도 없어 그냥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재개발과 관련해 나에게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가 왔다. 회의에 나가서 보니 이권 다툼이 벌어졌는지 깡패들이 몰려와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래서 다음 회의부터는 나가지도 않고 다시 잊어버렸다.

그 후 미술관 건축공사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빚을 얻고 융통하고 있는 와중에 부동산 업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땅을 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현금을 쥐게 되었고 나는 이 돈으로 일단 미술관 건축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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