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宗家) 마을은 확실히 분위기부터 달랐다. 입구서부터 충신 열부들을 모신 전각과 구옥(舊屋)들이 기를 죽였다. 방자한 걸음걸이도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 따위의 한자가 쓰인 현판들을 지나면서 절로 다소곳해졌다. 한낮인데도 100호 정도의 크지않은 마을은 고즈넉했다. 느릿느릿 길을 나서다 의아하게 외지인을 돌아보는 촌로의 눈빛에도 녹록치 않은 기품이 엿보였다.대구 달성군 현풍면 솔례마을의 '현풍(玄風) 곽(郭)씨' 집성촌. 행정구역으론 대구광역시지만 전형적인 농촌이다. 넓은 벌을 앞에 두고 대니산(大尼山)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 안았다. 언뜻 풍수 문외한의 눈에도 금계포란(金鷄抱卵)의 명당이다.
그 마을 맨 위에 고색창연한 기와집이 앉았다.
대문, 중문에 본채를 가운데 두고 행랑채와 사랑채, 재실(齋室)과 가묘(家廟)까지 갖췄다.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넘은 배롱나무 두 그루가 뒤뜰에 넉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선비집안의 풍모가 도저한 현풍 곽씨 종가다. 임란 때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비롯, 숱한 충열지사를 배출한 그 집안이다.
주눅 든 상태로 집안에 들어섰을 때 잠깐 혼란이 일었다. 고가(古家) 뜰 한가운데 흰색 아반테 승용차의 매끈한 모습부터가 생경했던 데다, 곧 이어 나온 차의 소유주이자 이 집안의 안주인 이정자(李亭子·53)씨. 캐주얼한 차림에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두드러진 얼굴, 군살 한점 없는 날씬한 몸매, 가녀린 손가락…. 대개 반가(班家)의 종부(宗婦)라면 떠오르는 이미지란 그런 것 아니던가. 수더분한 한복차림새에 둥그스름한 얼굴, 넉넉한 몸매에 일로 굳은 손마디 등. 그런데 이씨는 오히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더 잘 어울릴 만큼 날렵하고 도회적이었다.
그러나 당혹감은 이내 '역시…'하는 끄덕거림으로 바뀌었다. 대청마루에서의 그 긴 인터뷰 내내 단아하고도 꼿꼿한 이씨의 앉은 품새는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자못 쑥스러워 하면서 풀어내는 삶은 예상했던 종가 며느리의 전형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서구적 미모의 여인은 뜻밖에도 결혼부터가 가히 '전설의 고향' 수준이었다. 이씨의 고향은 멀지않은 경북 고령. 그 또한 고장의 명문 성산 이씨 가문이었다. 고교 졸업 후 직장에 다니던 스물 넷 무렵, 큰 집안끼리의 교우가 낙이었던 큰아버지가 현풍 집안과 의기투합을 했다. "우리 질녀가 아주 참한데." "마침 괜찮은 우리 종손주가 있는데…." 대구에서 선 보고 막바로 혼사가 이뤄졌다. 엄한 가풍에서 감히 의견을 내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된 종가 며느리 생활. 제사만 일년에 열다섯 차례였다. 5대까지 조상을 모시는 기제사(忌祭祀)만 아홉번에 명절 차례, 시월 상달의 묘사, 동지 차사까지…. 특히 동지 섣달에는 3, 4번씩 큰 제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뿐이랴. 시부모님과 일가 생일까지 합치면 도무지 거르는 날이 없었다. "지금도 새해 달력을 받으면 집안 행사를 표시합니다. 거의 빈칸이 남지 않아요. 자고 나면 제사, 자고 나면 또 제사지요."
또 있다. 제사일이 아니더라도 시도 때도 없이 전국에서 종친들이 몰려든다. 그 분들이야 모처럼 핏줄의 근본을 찾는 나들이지만 소홀할 수 없는 종가 아낙으로선 보통 일이 아니다. 봄철에는 종친들을 태운 버스가 한꺼번에 4, 5대씩 들이 닥친다. 줄잡아 200명이 넘는 인원에 식사와 술을 대접해야 한다. 상당수는 선뜻 일어서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인지 아예 며칠 묵기도 한다. 넘치는 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몇년 전 뒤뜰에 100여평 규모의 재실(齋室)을 한 채 더 들였다. 종답(宗畓)에서 소출이 나오고 종친들도 조금씩 보태 경제적으로는 그래도 견딜만 한 것이 다행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이씨의 기상시간은 늦어도 6시, 잠드는 시간은 대중이 없다. 손님들이 늦도록 술을 청하면 꼬박 밤을 새야 한다. "비호(飛虎)처럼 날아다녀야지요. 아침에 어른께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오늘 누구 누구가 온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날 업무량이 정해지는 거지요."
이씨가 특히 힘든 시기로 기억하는 건 신혼 초 맞았던 시아버님의 삼년상(三年喪) 때다. 종가살이에 채 적응도 안된 새색시가 꼬박 소복을 입은 채 오직 조석으로 제례에, 밀려드는 손님만 치렀다. 시어머니(김두교·金斗橋·82)도 계시고 가복(家僕)도 있고 동네에서도 거들었지만 어차피 주무(主務)는 이씨일 수 밖에 없었다. 삼년상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조선 현종 때 박세당(朴世堂) 같은 선비조차 폐지를 주창했으랴. 그런데 생각해 보라. 이씨가 삼년상을 치를 때가 서구화와 산업화의 물결이 도도하던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그는 앉아서 식사해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부엌에다 밥을 만 국그릇을 놓고 무시로 들고 나며 한 숟갈씩 급하게 떠먹었다. 그러니 한 그릇을 먹는데 한나절이 걸리는 건 예사. "밤만 되면 울었지요. 하루종일 앉지 못하고 뛰어다닌 탓에 발뒤꿈치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어요. 3년 만에 소복을 벗고 색깔 옷을 입으려니 영 어색하더라구요. "
첫 아이 백일이 지나 친정에 처음 갔을 때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께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눈 감고 묵묵히 얘기를 듣던 아버지는 출근하더니 남편(현재 지역농협의 전무인 곽태환·郭泰煥·56세다)에게 전화를 걸어 딱 한마디를 했더란다. "데리러 와라."
― 힘들 때 그래도 남편 분이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까.
"경상도 남자가 뭐…. 밤에 울고 있으면 히뜩 한번 쳐다보고는 '울지말고 자라'하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지는 게 전부였지요."
그러면서도 이씨는 은근히 남편 자랑을 붙였다. "그래도 이 넓은 집 청소와 관리는 전부 남편이 다 합니다. 엄청나게 힘들지요. 종손이 아니라 머슴입니다." 슬쩍 "정말 속 깊은 분을 만나셨다"고 거들었더니 얼굴에 흐믓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종가 살림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할 수는 없는 터.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도 그렇지만, 잔뜩 새 식구를 주시하는 종가어른들에게는 사소한 실수라도 자칫 크게 흠 잡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살다보니 동네 발걸음도 시집온 지 7년 만에야 해 봤더란다. "팔순 노인도 허리를 굽히는 등 모두가 깎듯이 대합디다. '그래, 종가 며느리가 이왕 내 운명이라면 차라리 즐기자'고 다짐했지요."
16년을 하루 같던 생활은 막내아들(22·군 복무 중)이 초등학교 5학년이던 10여년 전 전기를 맞았다. 아이 교육을 위해 대도시로 나가기로 한 것. 남편과 대구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그 이후 수시로 대구와 현풍을 오가는 두집 살림을 하고 있다. 운전면허도 그래서 땄다. 물론 그렇더라도 꼬박꼬박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그 많은 손님을 치르는 일에는 추호도 바뀐 게 없다. 여전히 홀로 현풍 종가를 지키고 계신 시어머니를 챙기는 것도 이씨의 일이다. 젊을 때 큰 힘이 돼주었던 시어머니도 연로한 만큼 이씨의 일은 오히려 더 많아진 셈이다.
"그래도 예전만큼이야 하겠어요? 장에서 편하게 사다 쓰는 제물(祭物)도 많아졌고…. 전에는 콩나물 따위도 일일이 다 집안에서 키워 쓰고, 북어 같은 건 종일 두드려 껍질을 벗기고, … 갖가지 떡도 다 집에서 만들었어요." 그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익힌 솜씨가 어디 가랴. 송화가루, 당근 등으로 이씨가 직접 만들어 내온 다식의 맛과 모양이 과연 예사롭지 않았다.
이번 추석을 앞두고는 이미 열흘전부터 준비가 시작됐다. (그래봐야 이 집에선 일상이지만) 100여명 종친 어른을 모시는 일인데도 이씨 얼굴에는 시종 여유로운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힘든 삶을 살아 왔지만 이제는 보람이 훨씬 더 큽니다. 내 손으로 우리의 전통 예법을 제대로 지켜온 데 대한…."
이씨는 요즘 그 바쁜 틈에도 서예와 다도를 익히고 대구의 학교들에 나가 전통예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지금 사회문제라는 게 다 효와 예를 잃었기 때문이지요. 부모가 바로 선 집에서는 절대로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둔 3남매도 주위의 칭찬을 받을만큼 모두 반듯하게 자랐다. 그는 출가한 첫딸로부터는 벌써 손녀를 본 할머니이기도 하다)
이씨는 오랜 세월 겪어온 희생과 눈물을 강조하지도, 또 특별한 인생이었음을 과시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잔잔한 미소로 얘기할 뿐이었다. 성실하고 부끄럽지않은 삶을 살면서 마침내 성취를 이뤄낸 이의 행복한 표정으로. 종가 며느리를 보는 세인의 시각이 어떻든, 그는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자기 삶의 주인이었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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