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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대구 만촌2동 광명타운 담장없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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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대구 만촌2동 광명타운 담장없는 마을

입력
2003.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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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나서던 김정숙(59)씨가 먼저 아는 체를 한다. "어데 갔다 오요, 어제 안 계시대?" 장 꾸러미를 추스르며 되받는 이종일(54)씨의 말은 좀 뜬금없다. "예에∼, 덕분에 된장국 맛있게 묵었십니더." 동문서답 같은 두 사람 대화를 풀어보자면 우선 김씨는 텃밭에서 딴 애호박 하나를 어제, 그러니까 지난 2일, 이씨의 빈 집 문 앞에 두고 갔음을 에둘러 말했던 것이고, 뒤늦게 애호박의 출처를 알게 된 이씨가 잘 받았다며 인사를 챙긴 것이다. 이 말 저 말, 한참을 이어가던 김씨가 장 꾸러미를 무람없이 들여다보다가 "아이고 그 고사리 좋다. 어데서 샀노?" 운을 떼자 이씨는 빙그레 웃으며 또 한마디. "식전에 잠깐 들를께예." 모르긴 해도, 이씨는 다듬은 고사리를 한 움큼 쥐고 저녁 준비 전에 김씨 집에 들를 터. 김씨의 표정은 이미 고사리 반찬 메뉴를 구상중인 듯 보였다. 담장 없이 이웃해서 살다 보면 마음의 담도 허물어져 이렇게 잘 통하는 것일까.환경이 인심을 만드나봐요

대구 수성구 만촌2동 광명타운하우스. 5,000평 남짓되는 공간에 단독주택 68가구가 연립해 담장도 없이 알콩달콩 살아온 게 1983년부터다. 최근에야 신도시 단독주택지나 도시 외곽 전원주택들이 조경미를 따져 담을 없애고 있지만, 광명타운이 들어서던 당시만 하더라도 담장은 집 주인의 위세를 과시하는 수단이어서 높을수록, 두터울수록 부동산 가치를 더 쳐주던 시절이었다. 그걸 시공업체와, 당시로서는 돈께나 있다는 축에 들던 입주민들이 동의해 울타리 없는 마을을 앉힌 것이다.

모양 삼아 쌓아 올린 어른 허리 높이의 붉은 벽돌 담이 띄엄띄엄 있고, 둘레를 두른 편백이나 봉숭아 등 관목과 화초들이 또 자기 키 만큼씩 자라 길과 집, 집과 집의 경계를 이루고 섰다. 그래서 현관문만 열고 나서면 이웃 집 서너 가구의 마당이 한 눈에 들어오고, 굳이 목청을 안 돋워도 웬만한 대화는 선 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구조. 그러다 보니 주민들은 어느 집 마당에 모란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 너나 없이 찾아와 모종을 얻어가고, 어느 집 넝쿨장미가 절정이더라는 얘기가 들리면 카메라부터 챙겨 들게 된다.

"처음에 와서 봉게 그래도 허전한 기… 이래 살겄나 싶디마, 지금은 담 쌓고는 못 살겄는기라." "뒤뜰 장독대 된장이라도 누가 퍼가모 우야노 싶었는데, 인자는 그런 걱정 안합니더." 근년에 이사 온 한 주민은 "환경이 인심을 만드는 것인가 보더라"며 웃었다.

20년 마을 자치의 저력

그렇게 20년을 살아오는 동안 숱한 사람들이 이사를 나고 들었으니, 말도 탈도 없지는 않았다. 초기 어떤 집에서는 지붕을 이어 실내 공간을 넓히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다. 내 집 마당을 줄여 집을 넓히겠다는 것이니 법적인 하자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마당이 경계도 없이 닿아있는 이웃 집으로서는 그게 못마땅했고, 주민들끼리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만일 이 집 저 집 따라 하다 보면 단지 전체의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주민들이 압력행사에 나섰고, 끝내 문제의 세대주는 고집을 꺾고 이사를 나가야 했다. 단지 주민들은 자치회를 만들었고, 정관 준칙에 선린·공공성의 명분을 내세워 자기 소유 부동산에 대한 '구조물 변형의 금지 조항'을 만장일치로 포함시켰다. 살다 보면 더러 성격들도 부딪치고, 이해가 얽혀 낯을 붉히는 일도 있지만 그만한 갈등이야 없을 수는 없을 터. 18년 째 살고 있는 고참 주민 이정숙씨는 "누가 좀 불편을 끼치는 일이 있어도 말 없이 참고 지내다 보면 대개 알아서 조심해준다"며 "그래도 안되면 관리사무소나 주민자치회가 나서 중재하면 된다"고 말했다. 도시가스 배관 설치, 전기설비 매설 등 마을 공동의 사안이 생기면 총회나 임시회를 통해 투표로 결정한다. 자가용 승용차가 늘어나면서 주차문제가 불거지자 주민들은 자기 집 마당을 개조해 주차공간을 만들었고, 담장이 없으니 낮 시간 빈 공간은 방문객 차를 댈 수 있어 주차 시비도 거의 없다.

주민들은 때때로 마을 어귀 공원에서 주민 음악회나 바자 미술전 등도 열고, 시골 대동계처럼 관광버스를 대절해 단합여행도 챙기며 산다고 했다.

젊고 따뜻한 마을이 모토

광명타운의 요즘 고민은 '소프트웨어' 복원에 맞춰져 있다. 80, 90년대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크든 작든 아이들이 있었고, 그 녀석들이 어울려 다니면서 사고도 치고 폐도 끼치면서 이웃간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아이들은 대부분 시집 장가들어 객지로 나갔고, 노부부만 덩그러니 남게 된 세대도 적지 않다. 얼마간 주민 세대교체도 이뤄져 원년 맴버들 사이에서는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도 들리는 게 사실.

최근 주거환경 개선분야에서 나라 일을 거드는 경북대 한 교수가 광명타운을 모델로 논문을 내면서 마을이 외부에 알려져, 올들어 서울시에서도 탐방을 다녀갔고, 한일교류센터 주관으로 일본 대학생들이 견학을 다녀가는 등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연초 자치회 운영위원장을 맡게 된 정희돈(64·영남대 교수)씨는 "마을 환경을 젊게 해 실버타운 분위기를 없애는 것과 전체 주민간 정을 더욱 두텁게 하는 게 올해 운영 모토"라며 "마을 자랑을 하기에 앞서 부족한 것들을 먼저 채우는 게 순서일 것"이라고 했다.

/대구=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대구광역시가 담장 허물기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 도시 이미지를 진취적이고 개방적으로 바꿔보자는 뜻에서 관공서부터 나섰고, 시민·사회단체가 가세하면서 99년부터는 민·관 한마음운동으로 자리잡았다. 그 사이 관공서 97곳, 주택·아파트 60곳, 상업시설 37곳 등 무려 250곳 1만2,800m의 담장이 헐려, 갇혀 있던 6만9,000여 평의 공간이 도심 휴식공간으로 변했다.

현재 사업 주체는 대구시와 시민단체 종교계 등 137개 단체가 네트워크화 한 '대구사랑운동시민회의'. 희망신청을 받아 시민회의가 실사를 한 뒤 타당성이 인정되면 시 예산으로 건당 300만원을 지원, 학계와 조경업체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에서 조경 자문 및 시공을 하는 절차로 진행된다.

물론 사적 공간을 공공화 한다는 게 당사자의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보조금이 있다지만 조경을 제대로 하려면 경제적 부담도 뒤따른다. 그래서 최근 시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적극적인 동참의사를 밝혔지만 일반 가정의 참여는 아직 미미한 편이다. 그래도 담장 행렬이 이어지다 옥수수 알 빼먹은 것처럼 군데군데 헐린 사이로 소담한 뜰이 나타나고, 철 따라 꽃이 피고 향기가 번지면 동네 사람들의 시선과 발길을 모은다.

"대구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곳이라 안 캅디까. 그래서 담을 헐고 세상을 보자는 취지지예." 이미 물꼬는 트였고, 더디더라도 흐름은 이어질 것이라는 게 시민회의 관계자들의 믿음이다. 원래 변화라는 것이 이렇게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곳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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