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앙코르∼! 신나는 걸로!"관객들 성화에 "준비한 게 없다"던 손사래도 잠시, 단원들이 능숙한 솜씨로 6줄 현(絃)을 튕기자 트롯가요 '사랑의 트위스트'가 흘러나왔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던지 참다 못한 아줌마 한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단원들과 어우러져 트위스트 스텝으로 덩실덩실 춤을 췄다.
물끄러미 먼산 바라기 하던 휠체어 아저씨도, 목에 깁스를 한 채 웃음을 참던 소녀도, 링거 걸이를 그림자처럼 의자 옆에 세우고 박수 치던 할머니도 흘러나오는 가락에 취한 듯 어깨를 들썩들썩, 입술을 실룩샐룩 노래가사를 흥얼거렸다.
절대 안정이 필요한 병원에서 웬 시끄러운 소음이냐고 탓한다면 오산이다. 나른한 한낮 경기 안양시 만안구 메트로병원 80여 평 1층 로비에서 꾸며진 작은 음악회는 환자와 보호자 60여명뿐 아니라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까지 함께 한 한판 대동(大同)의 자리였다.
정식 무대도 아닌 병원에서 환자들을 관객 삼아 연주회를 연 것은 주부 기타동아리 '오선지'.
오선지는 1996년 동안여성회관 기타반 회원들이 "기타로 좋은 일 한번 해보자"는 취지로 만들었다. 현재 30여명의 주부들로 구성된 오선지는 매달 한번 정도 메트로병원 안양병원 등 지역 병원 로비에서 1시간 동안 환우들에게 대중가요 팝송 등 감미로운 기타 선율을 들려주고 있다.
5만원짜리 싸구려 포크기타 둘러메고 중간중간 음이 틀려 얼굴이 발개지는 창피를 당하면서 병원 순회 공연을 돈 게 벌써 7년째. 지현옥(44) 회장은 "다들 아파 본 경험이 있어서 위로가 될까 하고 시작한 일인데 무표정한 환자들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를 생각하면 힘이 절로 나 중단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젠 기타연주도 노래솜씨도 수준급이다. 매주 3번 4시간의 단체 고강도 훈련과 집안일 틈틈이 손마디에 굳은 살 박히도록 기타 줄 뜯기를 반복해 실력을 키웠다. 회원 김혜옥(46)씨는 "공연 전날은 목 관리하느라 말도 아끼고 당일엔 날 계란으로 목청을 가다듬는다"고 노래비결을 귀띔했다.
반지계, 먹자계 대신 기타계와 적금 부어 거금 200만원짜리 전문가용 기타를 장만하고 앰프(증폭기) 마이크 등 연주기기를 장만한 것도 오로지 환자들에게 최상의 연주를 선물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선행은 선행을 낳는 법. 오선지 회원들은 병원 순회공연뿐 아니라 매달 회비를 쪼개 소년소녀 가장을 돕고 있다.
이들은 연주실력이 알음알음으로 퍼지면서 최근까지 병원 연주를 비롯해 시민축제, 한여름밤 음악회 등 146회의 공연을 소화했다.
오선지의 연주가 있는 날이면 병원은 모처럼 활기를 띤다. 의사와 간호사가 연주회에 참석한 환자, 보호자들에게 손수 커피와 음료수를 건네주고 공연도 함께 즐긴다. 최지은(31·여) 복지사는 "오랜 투병생활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는 산재 환자, 행려 병자 200명에겐 기타연주회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라고 했다.
아픈 게 죄라고 꿈도 못 꿨을 연주회를 병원 로비에서 즐기게 된 환자들의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고 4개월째 입원 중인 독거노인 박현자(70) 할머니는 연주회 날이면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는 오선지의 열성 팬. 노래를 듣던 박 할머니는 "들어봐. '모두 다 사랑하라'고 하네, 총각도 좋지?" 하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김정민(58·안양6동)씨도 "수술 걱정 때문에 침상에 누워 천장이나 쳐다보는 게 고작이었는데 모두 모여 연주도 듣고 노래도 따라 부르니 마음이 편해진다"며 기뻐했다.
기타연주회가 환자와 보호자에게 아름다운 화음만 선사하는 건 아니다. 신용구(42·정신과 전문의) 원장은 "가사와 가락에 녹아있는 메시지를 통해 스트레스가 해소될 뿐 아니라 신체 질병의 완화 효과도 있다"면서 "환자와 치료주체 사이에 일체감과 신뢰감을 심어주는 등 의사들도 못하는 일을 주부들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양=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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