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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98>金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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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98>金龍中

입력
2003.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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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9월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병원에서 김용중이라는 노인이 작고했다. 77세였다. "화장해서 뼛가루를 조국의 38선에 뿌려달라"는 것이 유언이었지만, 그가 해방 이후 남북 양쪽에 기피 인물이었던 터라 그 바람은 곧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용중의 유해가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옮겨져 안장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11월28일이었다. 비록 38선이라는 상징적 장소에 묻히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마침내 그의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충남 금산 출신의 김용중은 10대 말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 생애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살며 조국 해방 이전에는 독립운동에, 해방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자신이 창간한 잡지 '보이스 오브 코리아'를 중심으로 그가 설파한 중립화 통일론은 한반도 내외에 자주적 통일론의 씨앗을 뿌렸다. 김용중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초에 이미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해 미국 정계에 파문을 일으킨 바 있거니와, 4월 혁명이 열어 젖힌 자유의 공간 속에서 중립화 통일론이 고개를 들던 1961년 1월에는 남한의 장면 총리와 북한의 김일성 수상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중립화 통일을 촉구했다. 이 서한의 골자는 남북 사이의 연락부 설치와 중립국에서의 남북회담, 자유 총선거에 의한 제헌국회 창설과 전국 정부 수립, 유엔과 인접 국가들이 보장하는 중립화 등이다.

중립화를 추진하고 지탱할 만한 주체 세력이 남과 북 모두에 빈약한 상황이었던 터라, 김용중의 중립화 통일론은 현실을 초월한 이상주의적 열정의 소산이었다는 비판을 받을 만했다. 그러나 이상을 연료로 하지 않은 변화가 어디 있으랴. 냉전의 한 가운데서 동에도 서에도 속하지 않는 자주적 통일 국가를 그렸던 그의 꿈은 아름답고 정당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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