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입력
2003.09.06 00:00
0 0

시정곤 등 지음 한겨레신문사 발행·9,000원"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오늘은 2022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정부는 밝아 오는 뉴 이어인 2023년부터 영어와 달러의 공용화를 실시한다고 오피셜 어나운스먼트를 했습니다. 인터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이 대두한 지 실로 20년 만에 이루어진 센세이셔널한 이벤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투데이 뉴스에서는 스페셜로 영어 공용화 시대에 우리의 라이프가 어떻게 체인지될 것인지에 대해 디테일하게 리포트해 드리고자 합니다." 20년 뒤 한국의 모습은 이런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공식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방송이 자연스럽게 영어 단어를 절반 이상 섞고, 급기야 영어 공용화가 선포되는 것은 아닐까?

시정곤(한국과학기술원) 정주리(동서울대) 장영준(중앙대) 박영준(부경대) 최경봉(원광대) 교수가 쓴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은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영어 공용화 문제를 다룬 재미있는 가상 보고서이다. 2023년 영어 공용화 선언을 시작으로 공용화 이후 30년, 60년, 100년 그리고 500년 뒤 한국 사회의 실태를 나누어 묘사했다. 언어학자인 필자들이 그려내는 미래의 한국은 언뜻 보기엔 흥미로운 모습으로 가득 하지만 사실 영어 공용화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정부의 영어 공용화 발표에 세계는 부러움 반 우려 반의 반응을 나타낸다. 대통령도 취임 선서를 영어로 하게 됐고 국회의원도 해외파가 득세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힘을 얻는다. 그 동안 갈고 닦은 영어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환영하지만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사람은 직장에서 쫓겨날 걱정부터 한다. 영어 수업은 없어지고 모두 국어 수업이 되며, 공용화 원년에 광화문에서는 '우리말을 사랑하는 모임'의 촛불 시위가 벌어진다.

30년 이후의 풍경은 더욱 볼 만하다. 결혼 상대자 선호도에서 미국인이 1위를 차지하고 미국인 영어교사가 교직원의 45%를 넘는다. 세대 간 영어 구사력 차이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60년 이후 거의 영어 나라가 된 한국에서는 이제 중국어도 공용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드디어 영어 공용화 3세대가 사회의 주축이 된 2106년에는 초등학교에서 중국어가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고, 5년 뒤 제주도가 중국어 공용화 시범 지역이 된다.

그리고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500년 뒤. 한반도에서는 한국어가 완전히 사라졌다. 필자들이 가상하는 이 미래의 공간은 음성 인식이 가능한 자동 번역기가 보편화해서 어떤 말을 하건 듣고 싶은 언어로 번역해서 들을 수 있는 시대다. 그때 마침 공개된 500년 전의 타임캡슐에 남아 있는 한국어 문법책을 해독하는 것이 큰 관심사가 된다.

영어 공용화 문제는 1998년 소설가 복거일씨가 공용화 찬성 주장을 담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라는 책을 내면서 물위로 떠올랐다. 그 뒤 언론을 통해 찬반 토론이 열띠게 벌어졌고 이제는 제주도를 영어 공용 지역으로 시범 지정한다는 말이 현실성 있게 나오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의 필자들은 개인적으로는 공용화 반대 의견을 가졌지만 워낙 논쟁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가상의 보고서에서는 되도록 가치 판단을 유보했다고 한다.

대신 영어 공용화가 실시된 후 모국어를 잃어가는 과정을 일제시대 모국어 쇠퇴 과정과 대응하거나, 대다수 언어의 소멸을 주장하는 미래학자나 언어학자들의 주장 등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개연성 있는 미래의 현상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언어 현상이나 사회 현상의 일반적 원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영어 공용화가 가져올 결과를 객관적 입장에서 예측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만하다.

대개 자유주의나 경제논리를 앞세우는 영어 공용화 찬성론자들이 이 책에서 좀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은 60년 뒤 미국이 헤게모니를 잃고 중국이 인구를 바탕으로 세계 경제를 독점하면서 사람들이 중국어를 공용화하려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경상대 인문학연구소가 엮어 올해 초 낸 '세계화시대의 국제어'에서 석종환 경상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세계어로서 영어의 위상이 확고해지는 이면에는 다른 흐름도 있다. 세계 주도그룹으로서 영어권 나라의 위치는 유럽연합(EU)과 중국과 아시아 비영어권 국가에 의해 위협 받고 있다. 인구통계적 측면에서 비영어권 국가들의 젊은층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의사소통 도구로 영어를 배우려는 인구는 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영어의 위상은 크게 도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