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 라는 속담에는 번 만큼만 쓰라는 금욕과 절제의 경구가 담겨 있다. 빚은 무서운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외상 거래가 얼마나 뿌리치기 힘든 유혹인지가 역설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소리는 '빚지고 살지 말라'는 당부였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분수에 맞게 살라는 말이다. 넉넉하지 않은 가계를 꾸려 가려면 빚 안 지고 절약하는 수 밖에 없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나온 살림의 지혜였을 것이다.신용카드 사용과 대량소비가 미덕이 된 요즘, 카드 쓰는 것 보다 현금 내는 것이 마음 편한 것도 외상거래를 금기시 했던 어렸을 적의 학습효과 때문인지도 모른다.
올 들어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 먹는' 사람들이 335만 명을 넘어섰다. 30만원 이상의 빚을 3개월 이상 연체한 외상 거래자다. 이들 신용 불량자는 매달 10만 명씩 느는 추세다. 점잖게 말해 신용불량자지 실은 먹고 마시고 돈 안 갚은 불량 채무자다. 경제활동인구 여섯 중의 하나가 남의 돈을 쓰고 안 갚은 연체자라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최근 잇단 가정파탄과 동반 자살, 청주 새마을 금고 여강도 사건 등의 범죄가 모두 신용불량자와 무관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정부가 지난 주 신용불량자 구제책을 내놓았다. 대책의 핵심은 1,000만원 미만 소액 채무자 81만 명을 조기에 신용 회복시킨다는 것이다. 은행과 카드사들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신용불량자 수를 줄이겠다는 얘기다. 다급한 처지를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정부에게는 은행과 카드사들의 길거리 회원모집 경쟁을 수수방관해 신용불량자를 양산케 한 원죄(原罪)가 있다. 하지만 정부의 이번 대책은 마구잡이 회원 모집을 모른 체 한 것 만큼이나 무책임하다. 신용불량자 급증에 따른 모든 부담과 책임을 금융기관에 떠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신용불량자 구제 여부는 개별 금융회사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다. 정부가 개입해 빚을 탕감하라고 강요할 사안이 아니다. 언제 정부가 국민들 형편이 어렵다고 세금을 깎아주거나 면제해 준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개인의 빚 탕감은 없다고 강조해도 신용불량자나 채무자들 사이에서는 우선 버티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되기 마련이다. 정부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카드사들이 심지어 신용불량자끼리 보증을 세우는 편법으로 연체율을 낮추는 도덕적 해이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해외근무 때문에 일본과 프랑스에 각각 몇 년씩 머무른 적이 있다. 그 곳의 은행들은 개별적인 면접까지 하는 등 짜증 날 정도로 철저한 신용점검과 재정검토를 마친 뒤 비로소 신용카드를 내주었다. 하다못해 대형 유통업체 전용 카드 발급에도 꼬치꼬치 따지는 신용평가는 필수적이었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아예 카드를 발급하지 않으려는 금융회사의 신용관리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정부는 신용불량자 숫자를 인위적으로 줄이려 하기 보다 일자리 창출을 통해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데 주력해야 한다. 금융회사에게 빚 탕감을 강요하고 책임을 떠 넘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용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감독하고 독려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항간의 우려처럼 내년 선거를 의식해 '소 잡아 먹은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려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창 민 경제부 부장대우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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