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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8> 전남대 "함성"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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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8> 전남대 "함성"지 사건

입력
2003.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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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18일 오전 전남 광주시 모 화물탁송 회사에 대학생 한 명이 이불 보따리 하나를 맡겼다. '수신 서울 이개석, 발신 광주 이 강.' 조금 후 사복 경찰 몇 명이 나타나 보따리를 뒤졌다. 그 속에는 '고발(告發)'이란 제목의 유인물 500장이 들어 있었다. 72년 12월 10일 전남대 학생들은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일찍 등교했다. 10월 유신 발표와 함께 문을 닫았던 학교가 오랜만에 문을 열었다. 아침 일찍 교정에 들어선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무언가 부지런히 수거하고 있는 사복 경찰들을 보았다. 학교 곳곳에 '함성(喊聲)'이란 유인물이 뿌려져 있었다. 광주 시내 5∼6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도 그랬다.71년 10월 13일 전남대 교정에 '녹두(綠豆)'라는 지하신문이 뿌려졌다. 대규모 교련 반대 시위가 있은 직후였다. '녹두'는 시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15일 위수령이 내려지고 '녹두'를 제작한 전남대생 9명이 퇴학을 당하고 24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광주지검은 73년 3월 30일, 4월 6일, 4월 12일 세차례에 걸쳐 박석무(朴錫武·당시 29세, 광주 석산종합고 교사) 이강(李鋼·당시 25세, 법학과 2년) 김남주(金南柱·당시 26세, 영문과 4년 휴학·민족시인·94년 2월 사망) 등 전남대 졸업생·재학생 9명을 구속, 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박석무 이강 김남주 등은 10여 차례 모임을 갖고 "비상계엄은 친위 쿠데타이며, 헌법개정의 저의는 남북통일이 아니라 일당독재와 장기집권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폭거이므로 이를 전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법적 투쟁으로는 안되고 오로지 4·19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며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 구성을 음모했다. 또 '함성'과 '고발'이란 유인물을 통해 "박정희씨와 그 주구들은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종신집권 야망으로 국민의 귀와 눈에 총뿌리를 겨누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 자학과 어둠 속에 허탈을 일삼고 있는 언론인 청년학생 시민이여!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무서운 음모가 그칠 새 없는 독재자의 복마전을 향해 4·19 정신으로 총진격 하라"며 북한 정권과 노동당의 활동을 고무·동조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알면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결심공판(9월 14일)에서 박석무 이강 김남주에게 징역10년을 구형했다. 선고공판(9월 25일)에서는 북한과 노동당의 활동을 찬양하거나 동조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반공법 부분을 무죄로 인정, 세 피고인에게 징역2∼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12월 27일 항소심에서는 박석무에게 무죄, 이강 김남주에게 징역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해 석방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생 1,023명은 국무총리에게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은 정부 전복을 위해 내란을 모의한 수괴라는 박석무가 무죄를 선고 받고, 그 추종자라는 학생들이 유죄를 선고 받는 희한한 모습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이른바 '함성지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홍남순 변호사와 함석헌씨 등 재야인사들이 대거 관여하고, 서울의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광주에 내려와 방청하는 바람에 오히려 반(反)유신, 반정부의 토론장으로 변했다. 특히 제대로 배포되지 못했던 '녹두' '함성' '고발'이란 유인물의 내용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13, 14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석무씨의 설명. "70년 전남대 법대를 졸업하고 광주 북성중 교사로 근무하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71년 10월 법대 후배들과 함께 '녹두'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었다. 동학혁명을 이끈 녹두 전봉준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취지였다. 현재 성동구청장인 고재득씨가 주모자였다. 나는 '동학의 투혼으로 민족, 민주의 횃불을!!'이라는 창간사를 썼다. 하지만 대학원생이며 교사 신분이어서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함성'과 '고발'은 '녹두'를 원전으로 하고 있었다. 내가 '녹두' 제작의 배후였으며, 그 내용을 항상 후배들에게 역설해 왔다는 이유로 함성지 사건의 수괴가 됐다. '함성'은 이강과 김남주가, '고발'은 이강 혼자서 만든 것이다. 내란음모 단체를 구성하려면 수괴가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함성지 사건은 '녹두'라는 지하유인물을 1년여 만에 다시 세상에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이 '녹두'지를 읽었던 세대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됐으며, 당시 운동의 선두에 섰던 '녹두대'가 그들이었다. 3월 22일 검거돼 검찰에 넘어가기까지 약 1달 동안 전남도경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함성'이나 '고발'의 내용이 '녹두'의 창간사와 똑 같으니 틀림없이 내가 함성지 사건의 주모자라는 것이었다."

함성지 사건에 연루됐던 학생들은 이강, 김남주의 친구 동생 후배들이 전부였다. 민주쟁취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 사무처장을 지냈던 이강씨는 "경찰은 박석무 선배를 중심으로 '내란을 모의한 반국가 단체'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구성원은 너무나 미약했다. 유인물 등사하는 것을 구경했던 나와 김남주의 동생들, '함성'을 한두장씩 받았던 친구와 후배, 전남대 앞 C메밀국수집에서 나의 열변을 들어주었던 동료들이 반국가단체 단원의 전부였다"고 말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인 터 뷰/"함성"지 제작 주도 이 강 씨

전남대 법대 재학 중이던 69년 대통령 3선개헌 반대 데모에 앞장서다 입대했다. 고향(전남 해남) 친구인 김남주를 통해 박석무 선배를 알았다. 휴가 때면 박 선배를 자주 찾았다. 그는 다산 정약용과 녹두 전봉준 이야기를 많이 했다. 72년 여름 제대를 앞두고 다시 박 선배를 찾아갔다. "복학하면 다시 학생운동을 해야겠다"고 말하자 그는 "우선 학문을 쌓으라"며 유인물을 한 장 꺼내 주었다. '녹두'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집에 와서 두세번 읽어보고 책 갈피 속에 넣어 두었다.

8월 제대 후 김남주를 만났다. 그는 "졸업하기 어려울 것 같다. 고향에 내려가겠다"면서 앞으로 학생운동을 하려면 누구누구를 만나라고 말해주었다. 김정길(경영학과 2년) 김용래(법학과 2년) 이정호(물리과 2년) 등 당시 전남대 각종 서클의 리더들로 나중에 '함성지 사건'에 연루된 후배들이었다. 10월 17일 유신이 발표됐다. 다음날 아침 해남에서 전화가 왔다. 김남주는 "참을 수 없다. 당장 광주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둘이서 녹두 전봉준이 이끈 동학운동의 유적지를 순례하며 결의를 다졌다. 정읍 고창 황토재 등을 둘러보았다.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감상적 데모로는 안 되겠다.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지하신문을 만들자'고 합의했다. 녹두 전봉준의 외침을 상기하며 '함성(喊聲)'으로 이름 지었다. 필력이 뛰어난 김남주가 원고의 대부분을 썼고 나도 일부 글을 작성했다. 우리는 담양 장성 나주 화순 등지를 돌며 등사기와 인쇄잉크 등을 구입했다. 종이도 1,000매 구입했으나 줄판을 구할 수 없었다. 광주 북성중 교사로 있던 박석무 선배를 찾아갔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중고생 학습지를 만든다며 줄판을 빌려 달라고 했다. 박 선배는 "서툰 짓 말라.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거절했다. 중고시장에서 겨우 줄판을 구했다. 등사기 상태가 시원치 않아 500매 밖에 만들지 못했다. 자취방 구석에 숨겨 두었다. 11월 말이었다.

이 무렵 김남주는 후배 강모(여) 이모(여)를 다방에서 만났다. 그는 "내가 무덤을 파려고 한다. 묻을지, 묻힐지 모르겠다. 연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들은 약간의 현금과 끼고 있던 반지를 건네주었다. 나중에 이들 2명은 내란을 위한 자금제공자로 기소됐다.

12월 10일 기말고사를 치른다는 공고가 났다. 9일 밤 9시쯤 김남주와 둘이서 유인물을 꺼내 들고 전남대로 잠입했다. 각 단과대 강의실 창문을 열고 '함성' 20∼30매씩을 던졌다. 돌아오는 길에 광주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일고 운동장에도 뿌렸다. 일부만 남겨 통금 직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김남주는 다시 후배들을 만나 유인물 10여장씩을 건네며 "이것이 내가 파려던 무덤이다"고 말한 뒤 곧바로 서울로 피신했다. 고향 친구 이개석(서울대 동양사학과4년)군의 자취방으로 숨었다.

10일 등교하니 학교가 술렁이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함성'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인물은 아침 일찍 경찰이 모두 수거해 갔다고 했다. 당국은 '함성'의 내용이 '녹두'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박석무 선배를 조사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또 김남주를 지목했으나 그가 광주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사건은 유야무야 됐다.

이듬해 3월 새학기가 시작됐다. '함성' 2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광주보다 서울에서 뿌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여겼다. 김남주의 친구인 이개석에게 보내기로 하고 혼자서 '고발' 이란 유인물 500장을 만들었다. 이불 보따리 속에 넣어 3월 18일 서울 이개석의 자취집으로 수화물로 보냈다.

다음날 아침 등교 길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담뱃불 좀 빌립시다"하더니 갑자기 "너 이강이지"라고 소리쳤다. 주변에서 4명이 달려들었다. 눈이 가려진 채 승용차에 구겨 넣어졌다. 눈을 떠 보니 전남도경 지하 공작분실이었다. 7∼8명에 둘러싸여 30분 정도 다짜고짜 두들겨 맞았다. 그들은 "언제 북한에 다녀왔느냐" "언제 노동당에 가입했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눈을 가리더니 어딘가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전날 내가 보낸 이불과 '고발'이란 유인물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나의 자취방을 수색했다. 내가 카츄사에 근무하면서 구입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 30여권을 압수했다. 그들은 "모스크바에 언제 갔느냐" "김일성을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다그쳤다. 책갈피 속에서 '녹두'가 나왔다. 서울에서 김남주와 이개석이 잡혀 내려왔고, 몇일 후 박 선배가 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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