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할 것인가 ‘스톱’할 것인가. 어떤 패를 먼저 버릴 것인가. 무엇을 먼저 먹어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안전하게 피박이나 면할 것인가 무모하지만 고도리에 도전해볼 것인가.10분도 되지 않는 고스톱 한판에는 무수히 많은 선택의 순간이 교차한다. 한번의 실수가 치명적 상처가 되고 그것이 때로는 예상치 못한 ‘전세역전’을 낳기도 하는 작은 모포 위 세상은 인생과 다른 듯 닮았다. 가상의 인물을 통해 고스톱에 담긴 인생을 짚어봤다.
예상치 못한 명예퇴직을 권고 받은 고독박씨는 그 동안 악착같이 살아온 삶이 마냥 허무하게 느껴졌다.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A사에 입사, 빠른 승진 끝에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사까지 올랐는데 하루 아침에 나가라니…. 광박 피박에 독박까지 쓴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고씨는 문득 대학 낙방 소식을 접했던 고등학교 때가 떠올랐다. 부모님은 후기 대학 지원을 권했지만 고씨는 기어코 S대 경영학과를 가겠다고 재수를 택했다.
대학 명패는 ①'낙장불입(落張不入)'이라던데 괜히 엉뚱한 대학에 들어가 인생을 망칠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재수 끝에 S대에 들어간 고씨의 대학생활은 신났다.
하지만 여자 욕심이 많았던 고씨는 대학 3학년 때 동시에 네 명의 여자를 사귀다 축제 때 한꺼번에 탄로 나는 바람에 네 명으로부터 동시에 차인 가슴 아픈 일을 겪게 된다.
당시 소주를 병째 들이붓는 고씨에게 한 친구는 “②'비풍초똥팔삼' 모르냐. 버리기 싫어도 때가 오면 순서를 정해 정리했어야지, 쯧쯧…”이라며 쓴 충고를 했다.
정신을 차린 고씨는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학업에 몰두했다. 의아해 하는 주변인들에게 그는 “시기가 바뀌면 해야 할 일도 변한다”며 “③'밤일낮장'인지라 해가 밝았으니 다른 걸 좇아 살련다”고 뻐겼다. 그 덕인지 고씨는 동기 중 가장 먼저 대기업에 취업했고 500원짜리 급식으로 연명하는 동기들에게 소주와 닭갈비를 즐겨샀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술 얻어먹던 동기 중 한 명은 한달 전, 15년 공부 끝에 사법시험에 붙었다며 연락해왔다. ④'초식불길(初食不吉)'이라더니 나도 법 공부나 할걸 사회 물 일찍 먹은 거 하나 갖고 잘난 척하고 엉뚱하게 살았어. 완전 ⑤'염색착오(染色錯誤)'였구만.’ 마음이 점점 울적해졌다.
퇴직금으로 작은 아파트를 사서 월세를 놓고 번역일로 소일하던 고씨는 6개월 후 뜻하지 않은 뉴스를 접했다. 자신이 근무했던 A사가 분식회계로 입건되면서 임원 전원이 구속된 것. 고씨가 놀라 당황하고 있을 때 외출했던 부인이 돌아오며 말했다.
“여보, 지난번에 우리 1억원 주고 산 아파트요, 재개발 결정돼서 하루사이에 두 배 뛰었어요! 당신 퇴직한 거 완전 ⑥ '재형저축(財形貯蓄)'이었네.”
고씨는 무릎을 쳤다. ‘아! 이럴수가! 인생은 ⑦'운칠기삼(운칠기삼)'이라더니….’
1 낙장불입
▦ 뜻: 한 번 내려놓은 패는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무리하게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두 가지 삶의 모습을 그린 영화 ‘슬라이딩 도어스(Sliding Doors)’. 영화처럼 선택의 결과를 미리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신은 야속하게도 인생의 갈림길에서 아무 힌트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들이 모여 인생과 삶의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아닌지….
2 비풍초똥팔삼
▦ 뜻: 먹을 것이 없어 그냥 내놓아야 할 때는 ‘비_풍_초_똥_팔_삼’의 순서로 버려라.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만큼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고스톱 박사’들은 이 순서만 믿고 패를 내놓는 것이 반드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가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다.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반드시 가장 불필요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3 밤일낮장
▦ 뜻: 화투패를 뒤집어 밤에는 수가 낮은 사람이, 낮에는 수가 높은 사람이 선을 잡는다.
해가 진 후의 세상은 낮과 다른 법칙을 갖는다. 곧 때에 따라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영리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하는 농담 중에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라는 것이 있다. 무슨 일이건 할 때 안하고 엉뚱할 때 하겠다고 나서거나 시대와 맞지 않는 사업을 벌이면 밤에 장을 뒤집고 낮에 일을 뒤집는 꼴이다.
4 초식불길
▦ 뜻: 초반에 돈을 따면 방심하게 돼 결국 다 잃기 십상이다. ‘첫끗발이 개끗발’과 동의어.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어릴 적 ‘날고 기던’ 대부분의 천재들이 의외로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인기를 얻은 많은 아역 배우들이 자라서 오히려 맥을 못 추는 것을 볼 때면 과연 ‘초식불길’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잘 되는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5 염색착오
▦뜻: 흑싸리가 필요할 때 홍싸리가 나오거나 홍싸리가 필요할 때 흑싸리가 나온다.
고스톱에 2등은 의미가 없고 ‘비슷한 그림’은 무용지물이다. 차라리 다른 그림이면 기대도 않을 것을 비슷한 그림이 나올 때 갖는 순간의 희열은 극심한 절망감으로 연결된다. 입사시험에서도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 게 최종면접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낫고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헤어지는 것보다 속 편하다.
6 재형저축
▦ 뜻: 싼 패를 결국 싼 사람이 먹게 돼 남의 피까지 거둬들이게 된다.
한때 재형저축은 샐러리맨에게 가장 유효한 재산증식 수단이었다. 매달 월급에서 떼니 왠지 손해같았지만 일정기간 후 목돈이 돼서 돌아옴으로써 집도 사고 일시에 빚도 갚곤 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을 떠올린다. 행운인 줄 알았던 것이 재앙이 되고 망조라고 생각했던 것이 뒤돌아보면 일생일대의 기회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7 운칠기삼
▦ 뜻: 고스톱에서 승패는 70%의 운과 30%의 기술로 결정된다.
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슬롯머신이나 로또에서도 30% 정도의 기술력은 필요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영화 ‘사인(Sign)’처럼 삶에 있어서도 의외로 많은 부분이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결정되는 건지, 아니면 인생은 도박이 아니기에 ‘하기 나름’인지…. 삶의 많은 사건들은 날마다 화두를 던진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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