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나는 일본의 동경예술술대학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 학장과 함께 한·일 문화교류 2인전을 서울과 도쿄에서 잇달아 열었다. 히라야마씨는 내가 1989년 동경예술대학으로부터 45년 만에 졸업장을 받으면서 알게 된 일본 화단의 일인자다. 한일 문화교류 차원에서 가진 그와의 2인전이 성사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곡절이 있었다.내가 일본으로부터 교류전을 처음 제의 받은 것은 90년 6월 러시아 에르미타쥬 미술관 전시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당시 아마에 기시치로(天江喜七郞) 일본문화원장은 내가 뒤늦게 졸업장을 받을 때 힘이 되어준 히라야마 화백과 2인전을 열면 어떻겠느냐고 타진했다. 나는 당시 일본화가 나의 유화와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얼마 후 강용식 문화부차관이 서울과 도쿄의 문화교류전을 추진하는데 나를 한국 대표작가로 추천했으니 서울시 문화국장을 만나서 일정을 상의하라고 말했다. 그때 서울시에서는 시장 이름으로 도쿄도에 공문을 보내 구체적인 절차와 일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화국장이 바뀌면서 소동이 벌어졌다.
신임 문화국장은 "당신이 무슨 근거로 한국 대표작가냐"며 내 전시를 추진할 수 없다고 했다. 서울시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서울시 문화국 자문위원들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사이 일본에서 답신이 왔는데 발신자가 도쿄도의 시장이 아니라 계장 이름이었다. 서울시장의 이름으로 보낸 공문을 계장 이름으로 회답한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문화국장은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일본에서는 모든 게 담당자의 책임 아래 이뤄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국장은 교체되었다. 나는 시끄러워 서울시와 같이 일하는 것을 단념했다.
그렇게 지지부진하던 교류전은 의외의 기회에 급진전됐다. 하루는 나와 전혀 안면이 없는 오쿠라 가즈오(小倉和夫) 전 주한 일본대사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오쿠라 대사는 그 자리에서 나와 한일문화 교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대사관저의 만찬에 초청돼 가 보았더니 히라야마씨가 주빈이 되어 와 있었다.
얼마 후 히라야마씨는 당시 김종필 총리에게 인사를 했는데 김 총리는 그 답례로 문화인사 20여명을 총리관저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히라야마씨와 나는 의기투합하여 바로 교류전을 갖기로 합의했다. 전에 나는 일본화와 유화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모니즘의 원리가 이질적인 것의 조화임을 상기하고 함께 전시해도 좋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장소도 예술의전당과 요코하마 미술관으로 결정하고 문화부에 얘기했더니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 문제가 생겼다. 아사히(朝日) 신문사 후원을 받아온 히라야마씨가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자 문화부가 격이 맞지 않는다며 뒤로 빠졌다. 그래서 한 일간지와 문예진흥원, 한일문화교류회의를 접촉해 일본 '미술세계' 화랑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사히 신문사가 '미술세계'는 종교단체 관련 재단이므로 같이 일하기 곤란하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다른 후원사를 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요코하마 미술관 전시 스케줄이 바뀌면서 동경예술대학 대학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기로 최종 결정됐다.
마지막에 또 한 차례의 고비가 있었다. 나는 대한항공 협찬으로 도쿄까지 내 작품을 나르기로 했는데 아사히 신문사측은 자기들이 다른 항공사의 협찬을 받았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 말을 뒤집어 운임의 절반을 내게 부담시키려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수가 일일이 간섭하는 게 못마땅했던지 "당신은 관여하지 말라"고 해서 나는 "그럴 수 없다, 수는 내 미술관의 관장이고 이 작품들은 모두 그의 소장품이니 그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전시회 경비문제로 자기들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기에 나는 전시가 시작된 다음날 예술의전당으로 가서 문을 열지 말라고 소리치며 문 앞을 지켰다. 일본측에서 나에게 사과하고 모든 조건을 내가 요구한 대로 하지 않으면 서울 전시를 못하겠다고 하였다. 사태를 알아차린 히라야마씨가 "김 선생님의 작품을 이번에 일본에 가져가서 전시를 해야 한다"고 아사히 신문사를 설득했고 일본측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고는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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