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필터는 지난 해 하반기 가장 큰 화제가 된 밴드였다. 방송에서, 길거리에서, 끊임없이 '낭만고양이'가 울려 퍼졌을 때 체리필터 멤버들은 급작스러운 인기에 들뜨기보다 "밤새 쓴 연애편지 들킨 듯 낯 뜨거웠다"고 한다. "음악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명도만 너무 높아졌다"는 생각에서다. 때문에 2집 활동을 끝내자마자 멤버 4명은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새 노래 만드는 데 몰두했다. 그래서 "밴드가 새 음악을 만들고 앨범을 내 놓을 수 있는 최단기간"일 듯한 5개월 만에 3집이 나왔다.시각 청각 촉각 등 전 감각을 인식에 동원하는 영상세대에게 '니가 떠나 나는 눈물을 흘리고' '내 인생을 다 바쳐 너를 사랑해' 식의 간접 서술이나 시적인 노래는 얼마나 공허할까. 하지만 체리필터의 노래는 다르다. 온갖 색깔이 떠 다니고 손을 뻗으면 직접 느낄 수 있을 듯한 감각이 통통 살아있고 그래서 짧은 동영상이 한 편 돌아가는 듯 '스토리 텔링'이 되는 게 그들의 노래다. 가끔은 '헤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록의 외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노래는 전혀 거부감이 없다.
지난번 고양이에 이어 이번 주인공은 오리다. 펑크 스타일의 '오리 날다'가 타이틀곡. 강하면서 상쾌한 조유진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오리 날다'에서도 여전하다. 하늘을 날고픈 오리는 '오리는 날 수 없다'는 엄마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네모난 달'이 뜬 늦은 밤 달을 향해 날개를 흔들며 '깊은 밤 하늘의 빛이 되어 춤을 출 거야'라고 소망한다. 달님은 '어서 위로 올라와 나와 함께 놀자'고 한다. 노래는 팔딱팔딱 숨을 쉬는 듯 살아있다.
이런 음악이 가능한 것은 멤버 자체가 영상의 홍수 속에서 자라난 전형적 20대이기 때문. 1997년 정우진, 손상혁이 조직한 고려대 교내 밴드에서 출발, 채팅방에서 만난 인연으로 보컬 조유진이 손을 잡고, 뒤이어 연윤근이 합세하면서 체리필터는 시작됐다. 멤버들은 "부모님은 장래를 생각해서 기술 배워 기름 밥 먹고 살라고 하시죠"(연윤근), "노래 하다가 나이 들면 갈비집이나 차려야 하지 않느냐고 주위에서는 벌써 걱정"(정우진)이라고 하지만 "우리 앞에 열려 있던 수 많은 길 중에서 음악을 선택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고 입을 모아 자신 있게 말하는 건강한 젊은이들이다.
2집이 12만장이나 팔렸지만 이들은 번 돈을 모두 털어 홍대 앞에 작은 스튜디오를 차렸다. "5만원짜리 기타로 연주할 때도 있었거든요. '나중에 성공하면 꼭 좋은 악기 사야지' 했는데 돈이 생기니 정말 악기 사고 장비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욕심이 안 생기더라구요."
지난 앨범이 전체적으로 약간 산만한 느낌을 줬던 것과 달리 새 앨범은 뒤로 갈수록 진지하고 감동적이다.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Tick―Tock', 강렬한 느낌의 'No Peace, Yes war?' 등은 저마다의 색깔이 살아 있다. 특히 '꿈꾸는 쎄일러'는 20대의 감성이 철철 넘쳐 나는 듣기 좋은 록발라드곡이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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