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상을 떠난 미국 영화배우 찰스 브론슨은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을 앓아 자신이 영화배우라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생명 연장에 대한 열망과 함께 인류의 수명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는 알츠하이머병 등에 의한 '기억에 벗어난 생'이라는 반갑지 않은 선물을 받을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기억력 감퇴'에 관한 연구가 각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즈니스위크 최신호(1일자)는 세계 제약업계에 불고 있는 기억력 치료제 개발 열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 치료제가 상용화할 경우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를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는 분석도 하고 있다.개발 현황 및 효과
비즈니스위크지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서 60여개의 제약·생명공학 회사들이 기억력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이 중 약 40개는 인체 임상 실험을 진행하고 있으며 수 년 내에 상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본격적인 기억력 치료제의 바로 앞 단계라고 볼 수 있는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는 이미 3종이 출시돼 있다. 1990년대 초에 나온 화이자의 아리셉트와 노바티스의 엑셀론, 존슨&존슨의 레미닐 등이다. 이들은 모두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증가시킴으로써 초기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기억력 감퇴 속도를 둔화시키거나 지연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기억력 자체를 향상시키지는 못하며 구토와 식욕 감퇴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 등이 단점이다.
알츠하이머병 치료제이면서도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작용을 하는 최초의 약은 지난해 유럽에서 승인된 미맨타인(Memantine)이다. 독일 메르츠사가 개발한 이 약은 중증의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에게 효과를 나타낸다.
이상의 약들이 알츠하이머라는 특정한 질병에 대한 제한적인 치료제라면 'CX516'(코텍스사)과 'SGS742'(새기스사), 'MEM1414'(메모리사·이상 미국) 등은 기억력의 감퇴를 막는 치료제로, 상용화에 가장 바짝 다가서 있는 약들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가벼운 인지력 손상이나 기억력 감퇴를 치료하는 데 효능이 있다. 제약업계에서 "마법의 약이 눈 앞에 있다"고 흥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CX516과 SGS742는 2단계 인체 임상 실험 중이고 MEM1414는 1단계 실험을 하고 있다.
특히 CX516은 올 초 65∼75세의 건강한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한 2차 실험에서 주목할만한 기억력 향상 효과를 보였다. 2차 실험에 참가했던 76세의 변호사는 "매우 매우 주목할 만한 향상이 있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실험이 끝나 복용을 멈춘 그는 "약을 구할 다른 방법들을 강구하고 있다"며 "불법이든 합법이든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약은 또한 노인 뿐 아니라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지각 능력이 향상되는 결과를 보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
MEM1414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컬럼비아대 에릭 캔들 교수는 뇌세포와 신경전달물질을 연구해 기억 체계를 밝힌 공로로 2000년 노벨의학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한 이 분야 최고 권위자다. 캔들 교수는 "알츠하이머병은 10∼20년 동안 뇌에서 진행된 뒤에야 증상이 나타나는 탓에 현재의 치료는 절망스러운 지경"이라며 "좀 더 일찍 기억력 감퇴 현상에 개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망
최근의 연구 개발 속도라면 5년 정도 뒤에는 기억력 치료제를 일반인들도 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뇌에 대한 약이라는 점에서 상용화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한 알츠하이머 치료제가 임상 실험 도중 환자의 뇌에서 부작용을 일으켜 환자를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해 개발이 전면 중단된 것은 치료제 개발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기억력 치료제 자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학의 레온 탈 교수는 "우리는 정상적인 노화로 인해 기억력 감퇴를 겪는 정상인의 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발견하기까지 아직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 시장 규모는
기억력 치료제를 개발 중인 미국의 제약·생명공학 회사 10여 곳이 지금까지 쏟아 부은 연구 개발비는 15억 달러(약 1조 7,000억원)를 넘어선다. 그만큼 업체들이 기억력 치료제의 시장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근거는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세계가 급속도로 노령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만 베이비붐 세대 7,700여만명이 10년 내에 50대에 들어서고, 2050년까지 65세 이상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할 전망이다.
기억력 저하 등 인지능력의 상실은 육체적 질병 못지 않은 노인들의 최대 고민. 제약사들은 이를 해결해 줄 기억력 치료제가 상용화하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현재 60세 이상의 미국인 중 2,000만명 이상이 가벼운 건망증이나 알츠하이머병 등으로 인한 기억력 저하 증세를 호소하고 있고, 50대 중에는 800만명이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다. 미 알츠하이머학회는 베이비붐 세대의 최소 30%인 2,400여만명이 앞으로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인지능력 장애를 겪게 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의 뇌신경 전문가 해리 트레이시는 "예비노인들인 현재의 젊은 세대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왔기 때문에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젊은 정신을 유지해주는 약에 기꺼이 거금을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미국의 기억능력 관련 의학 및 제약 시장 규모는 1,000억 달러. 기억력회복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한 인삼 성분의 영양제는 5억 달러 어치가 팔렸고, 기억력 전문 병원들까지 성업 중이다.
세계 제약업계는 기억력 치료제가 비아그라를 능가하는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미국 투자회사인 뉴브리지 캐피탈의 분석가 배린슨 버거씨는 "연간 매출액 17억 달러 수준인 비아그라보다 최소 10배 큰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며 "누가 시장을 선점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제약 업계의 판도가 바뀔 것" 이라고 전망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