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는 역사 체험을, 외국 손님에겐 문화 체험을 해주겠다며 찾는 고궁. 하지만 고궁안에만 들어서면 막연히 갖고 있던 자신감은 수많은 건축물들 앞에서 한번,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안내표지판 앞에서 또 한번 꺾이고 만다. 뭐부터 어떻게 설명할 지 몰라 허둥대고 있는데 질문이라도 쏟아지는 날에는 등줄기로 식은 땀이 줄줄 흐른다. 이럴 때 곁에서 친절히 설명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하다.서울시가 지난달 4일부터 운영중인 4대문안 도보관광코스 문화유산해설사들이 바로 이런 고민을 해결해준다. 덕수궁―정동코스, 경복궁―인사동코스, 종묘―창경궁코스에서 이들 해설사의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시는 3월에 도심의 고궁과 유적지를 찾는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우리 문화 이해를 높이기 위해 100명의 예비 문화유산해설사를 선발했다.
별도의 보수 없는 자원봉사임에도 200명 가량의 지원이 쇄도해 선발하는 과정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후 4개월에 걸쳐 전문가들에게 역사와 문화 강의를 듣고 현장 실습 과정을 거쳤다. 시험도 치렀는데 기준 점수 40점을 넘지 못한 20여명이 여기서 탈락하기도 했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64명(영어 34명, 일어 30명)의 제1기 문화유산해설사가 탄생, 지난달부터 현장 활동에 들어갔다. 40대 중반이상이 대부분인 해설사들은 정년퇴임한 교장, 전직 항공 승무원, 퇴직 은행원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달 가량의 현장 활동을 한 이후 해설사들이 지난달 29일 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서로 코스와 일정이 달라 마주치기 힘들었던 터에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들 마냥 반갑기만 했다.
손을 부여잡고 서로의 안부를 묻던 이들은 곧이어 각자의 경험을 무용담처럼 꺼내놓기 시작했다.
"찌는 더위에 숨은 턱턱 막혀오지, 몇 시간을 땡볕 속에 걸어 다니는 게 여간 힘들어야죠. 설명을 하려는 데 입이 바짝 타버려 말이 안나옵디다." "막상 남들 앞에서 설명하려고 하니 밤새 외워놨던 내용이 까맣게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난감했는지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더라구요." "외국인이나 아이들의 질문이 보통 특이해야죠. 대답이 궁해 얼굴이 화끈거린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모두들 비슷한 경험에 고개를 끄덕였고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고충담은 악조건에서 몇 시간을 버텨낼 체력을 유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담력이 필요하다는 데로 모아졌다.
34년을 영어교사로 재직했던 이광신(63)씨는 "실수가 자꾸 반복되는 곳은 설명문 전용 단어장을 만들어 휴대하고 다니고, 체력유지를 위해 예전에 그만뒀던 등산을 다시 시작했다"며 자신만의 해결책을 내놨다.
종묘코스의 각종 제례에 대한 설명을 맡은 배선숙(51·여)씨는 "일본관광객들에게 일본과 우리의 다른점을 비교해 설명하면 좋을 것 같아 일본 제례문화 공부를 시작했다"며 "좀 더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설사들을 위한 공부방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002 한일월드컵을 비롯해 다양한 자원봉사 경험이 있는 박희옥(52·여)씨는 "선조들이 남긴 우수한 전통과 문화를 일깨워주는 숭고함이 그 어떤 자원봉사 때보다 내 자신을 뿌듯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외국인들의 진지한 눈빛이 절로 흥을 일으켜 무더위를 견뎌냈다"며 소감을 덧붙였다.
해설사들은 두어 시간 남짓 우리 문화·역사에 대한 사랑과 자원봉사의 기쁨을 함께 나눈 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헤어졌다.
서울시 관광과 이숙형 팀장은 "해설사들의 활약으로 한 달 만에 1,700여 명이 도보관광코스를 다녀갔다"며 "앞으로 중국어를 포함한 2기, 3기 해설사를 선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설사들과 함께하는 도보여행에 참가하고 싶으면 서울시 홈페이지(www.seoul.go.kr)를 통해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예약하면 된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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