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 허둥대던 나이 어린 여자 변호사를 기억하지 못하시지요? 사실 저도 재판관님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이런 제가,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되신 날, 문득 재판관님께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면, 이상한 일일까요?아, 그날 괜히 제 가슴이 뛰더란 말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출산 휴가 때면 같은 층 남자 판사 전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던 시절, 그 몇 사람 안 되는 여자 판사들이 만나기만 하면 그저 눈물이 나왔다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밤 9시까지 판결을 쓰고 그 날 밤에 분만했다는 '독한' 이야기들도요. 언제나 따라다녔을 '최초의 여성' 꼬리표가 그리 좋지만은 않으셨을 텐데, 이제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까지 되셨으니. 오죽하면 재판관님에 대한 약자들의 기대를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셨을까요.
마침 시민 사회단체의 대법관 후보 추천 논란 가운데 나온 일이라, 재판관님의 지명에 대해 반응도 제 각각이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우셨지요? 그 추천 명단에 재판관님 이름도 들어 있었던 터라, 인터뷰 때마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들으셨더군요. "후보 추천 단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공개적 후보 추천은 잘못"이라고 답하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대법관 추천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사법연수원에서 '사법의 독립과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발표했던 수업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들어주실래요?
그 때 저는 학교 다닐 때 있던 일을 소재로 잡아 발표를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여대생이 그 아버지를 살해한 일이 있었잖아요. 그 때 재판부에 선처를 바라는 서명을 받고 있었는데, 한 후배가 죽어도 서명을 안 하겠다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그런 식으로 재판부에 압력을 행사하면 사법부의 독립을 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사법부는 다른 권력으로부터는 다 독립해야 하지만 여론에 귀를 여는 것이 그 독립을 해하는 것은 아니다"고 이야기했었고, 수업 시간에도 그 일을 되짚으며 "사법도 민주주의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다"며 발표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듣고 계시던 부장판사 교수님이 "뭘 몰라서 그런다. 실제 재판하는데 사건 당사자도 아닌 여성단체 같은 데서 탄원서니 하는 게 들어오면 어떤 줄 아느냐, 협박당하는 느낌"이라고 하시더군요. 가슴만 뜨거운 연수생과 실무를 너무 잘 아는 선배 판사님 사이에 당연한 간극이었지요.
제게 이번 대법관 후보 추천을 둘러싼 논란들은 그 간극을 좁히는 첫 걸음으로 보였고, 그래서 (외람된 말씀이지만) 매우 즐거웠답니다. 국민들이 대법원의 역할과 중요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누가 대법관이 되면 좋을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잖아요. 법원도 무엇이 국민들과 공감하는 '정의'인지, 국민들이 어떤 법원을 원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가벼운가요?
대법원의 실정이나 후보자들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추천하는 것이 문제있다는 지적도 정말 맞는 것 같아요. 다음부터는 더 많이 알아야 하겠어요. 그러니까 모두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판결이 있으면 누구나 찾아볼 수 있도록 친절히 알려 주세요. 제대로 잘 알고 추천할 수 있도록, 누가 그런 판결을 했는지, 판사 친구가 없어도, 변호사 삼촌이 없어도 알 수 있게 해주세요.
이런 이런. 엉뚱한 이야기만 실컷 하다가, 재판관님께 뭔가를 따지고 조르는 말투가 되었네요.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사실 저는 어느 신문에 실린 "양성평등 사회를 이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라는 친필 약속에 가슴이 뭉클해져 이 글을 시작했거든요. 이제 어려움을 뚫고 성공한 여성 법조인 선배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의 바람을 알고 가시는 그 길에, 뜨거운 파이팅의 박수를 쳐도 되지요?
김 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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