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선종한 김승훈 신부는 1970·80년대 민주화·인권 운동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중심 인물이었다.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고(故)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면서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함세웅 신부와 함께 사제단의 실질적 운영을 맡았으며 1977년 명동성당 3·1절 구국선언사건을 계기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제5 공화국 말기인 1987년 5월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모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성명은 5공 정권에 등을 돌린 민심을 행동으로 이끌어 6·10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됐으며 나아가 6·29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훗날 "고문치사 자체도 용서할 수 없었지만 사건의 진상을 축소·은폐· 조작한 정권의 비도덕성에 공분을 느꼈다"며 "사제단은 두 달 동안 은밀한 조사 끝에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뒤따르더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1970년부터 10년간 동대문 성당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동일방직 사건을 통해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 등 핍박 받는 이들을 끌어안았다. 또 민가협, 범민련 등 재야 단체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임수경씨 방북 당시 처음에 임씨와 동행하겠다고 나서는 등 통일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39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성신대학을 졸업한 뒤 1962년 서울대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다. 정의구현사제단 활동 초기 천주교 교회로부터 공식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는 등 고독한 처지에서도 성직자로서, 또 민주시민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게 주변의 평가이다. 박종철씨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것이나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진상규명위원회,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등에서의 활동의 모두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는 1999년 회갑을 맞아 자신의 삶과 생각을 정리한 '당신께선 다 아십니다'라는 회고록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 때문에 돌이켜 보면 부끄러움 투성이"라며 겸손해 했다. 장례미사는 4일 오전10시 명동성당 대성당에서 정진석 대주교와 사제단의 공동 집전으로 열린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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