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한 분위기의 영화를 기획하며 김승우와 김정은을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감독은 없다. 김승우와 김정은은 각각 '라이터를 켜라'와 '가문의 영광'에서 번듯한 얼굴이 코미디를 연기할 때 웃음의 강도를 배가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불어라 봄바람'은 이 두 배우가 나오는 영화지만 그렇다고 두 배우의 전작보다 더 '웃기는' 것은 아니다. 이런 영화를 두고 '휴먼 코미디'라고 부른다면 감독은 '휴먼'을 강조함으로써 코미디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소설가 고선국(김승우)은 체면을 중시하면서도 난방비가 아까워 내복을 입고 지내고, 쓰레기 봉투 값을 아끼기 위해 성당 앞에 휴지를 버리는 괴상한 성격의 소유자다. 아버지가 사망 직전 2층 방을 세 놓는 바람에 다방 '레지' 화정(김정은)과 원치 않는 한집 살림을 하게 된다. 허울 뿐인 소설가는 화정이 들려주는 사랑 얘기를 몰래 소설로 옮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김승우는 허우대가 멀쩡하면서도 조잔한 성격이고, 김정은은 인간적 '푼수끼'가 사랑스운 캐릭터다. 사실 이런 역을 맡은 적이 없었는데도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 자연스럽다. 부분적으로는 능숙한 연기의 결과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움을 창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저 그거 짱 좋아해요" "졸라 잘 부탁드려요" 식의 저속하지만 귀여운 설정의 대사도 '튀는' LP판처럼 반복되니 까 지루하다.
하지만 조연에 대한 따뜻하고 고른 시선은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이다. 선국을 사랑하는 유일한 제자(남자!), 다방 마담에게 집적거리는 소설가 일행, 선국과 화정이 우연히 찾아간 어느 산골 마을의 노인의 정겨운 다툼까지 조연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어쩌면 하찮아 보였을 일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은 이 영화에 많은 영감을 준 것 같다. 승우가 전화기를 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설정(송강호가 레슬링 도장 앞에서 연출했던 장면)이나 '동물의 왕국'을 자주 보는 캐릭터('반칙왕'에서는 송영창이 그랬다) 같은 것들이 그렇다. 쓰레기를 버리던 선국이 신부와 학생들에게 쫓기는 장면은 '품행제로'의 도입부를 연상시킨다.
주인공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달려 보이는 것은 최대 약점이다. 허위의식으로 가득찬 소설가가 다방 아가씨의 '놀라운' 사랑 얘기를 훔쳐서 책으로 낸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가 될' 그 얘기에 대한 구체적 묘사 없이 얼렁뚱땅 넘어간다. 하긴 영화 속의 소설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될 두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 흐름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영화의 감독에게 사랑 얘기는 다소 버거운 모양이다. '휴먼'에 강하고, '코미디'에 약한 면모를 보인 주인공은 '라이터를 켜라'를 만든 장항준 감독.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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