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비자금 사건의 진상을 밝힐 핵심 인물로 꼽히는 김영완(50·미국체류)씨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지난달 31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기소하면서 검찰은 김씨가 변호인을 통해 보내온 자술서 내용과 검찰 수사내용이 완벽히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지난달 중순에 이어 최근 2차로 자술서를 보내왔고 조만간 추가자료를 보내기로 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2차 자술서에서 현대가 권씨에게 200억원을 준 사실, 이중 150억원을 자신이 2000년 4·13 총선전에 권씨에게 전달한 사실 등을 시인했다. 김씨는 "십 수년간 친하게 지내온 권 고문이 나의 진술로 인해 어려운 입장에 처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며 인간적 번민을 토로하면서도 "진술내용은 모두 사실"이라고 못박았다고 한다.
또 200억원 중 나머지 50억원에 대해 김씨는 "2004년 17대 총선 출마를 위해 권 전 고문이 보관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50억원을 권씨 개인용도로 보관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씨의 정치적 대의명분은 상당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물론 권씨는 200억원 수수 자체를 부인하고 있지만 어쨌든 당과 조직을 위해 돈을 받아 쓴 것과 개인용도로 숨겨 둔 것은 천양지차다. 진술의 구체적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권씨의 총선출마용'이라고까지 밝힌 것은 권씨측으로선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으로, 자칫 이로 인해 '파렴치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양도성예금증서(CD) 15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서도 김씨는 검찰측 시각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김씨의 1차 자술서가 도착한 직후 "(자술 내용이) 검찰이 파악한 박씨의 혐의내용과 다르지 않다"며 고무된 바 있다.
박씨와 권씨 모두에게 김씨는 자신들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권씨 등이 '입 무겁고 충직해서' 신뢰했다는 김씨가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사실관계를 털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범죄자가 수사기관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을 경우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해 주는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이 검찰과 김씨 간에 이뤄졌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김씨는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장기간 미국체류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고 또 수백억에 달하는 국내 재산이 검찰에 압류 당한 상태다.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죽음으로 박씨와 권씨의 혐의 입증에 어려움을 겪는 검찰, 자신의 기반을 유지해야 하는 김씨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김씨가 머지 않은 시점에 자진 귀국하리라는 시각도 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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